‘프라하의 소녀시대’ - 요절한 일본인 통역사 요네하라 마리의 소녀시절 이야기

스카이뷰2 2015. 5. 4. 12:37

 

체코 수도 프라하체코의 상징인 프라하, 아름다운 도시의 풍경      

 

                                                   

 

 

 

           ‘프라하의 소녀시대’

              - 요절한 일본인 통역사 요네하라 마리의 소녀시절 이야기-

 

 

 

프라하를 다녀온 뒤부터 프라하가 무슨 고향이라도 되는 것처럼 프라하에 관련한 소식에 대해 부쩍 관심이 많아졌다. 며칠 다녀왔다고 이러니 지금 소개하려는 일본 여성 요네하라 마리처럼 ‘빛나는 소녀시대’의 5년간 프라하에서 ‘조기유학’을 한 사람에게 프라하와 추억의 소녀시절은 어떤 의미일지 어렴풋이나마 짐작이 간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라는 책은 인터넷 서핑을 하다 우연히 알게 됐다. ‘프라하’라는 서정적 감성의 이미지와 ‘소녀시대’라는 그야말로 소녀취향의 단어를 조합한 책 제목을 보는 순간 이 책 괜찮겠다는 직감이 들어 바로 동네 단골 서점에 전화를 걸었다.

 

책방 여점원은 ‘프라하의 소녀시대’라는 책이 있냐고 묻자 찾아보고 전화 드리겠다고 했다. 성미 급한 나는 없으면 출판사에 주문 좀 부탁해요라고 미리 말했다. 5분 쯤 후, 책방 여직원은 자랑이라도 하듯 “다행히 있네요. 지금 따로 뽑아놓겠습니다”고 말했다. 2006년 발행한 책이어서 재고가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일본에서 한류 붐을 타고 10대 소녀들 사이에서 최고 인기를 누린 ‘소녀시대’라는 걸 그룹을 앞세워  출판사에서 마켓팅에 꽤나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초판은 06년에 나왔고, 얼마 전 재판을 찍었다고 한다. 더구나 한국인들 사이에 '프라하' 라는 도시에 대한 인기가 높아졌으니 출판사로선 '이삭줍기'에 나섰을 법도 하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나와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단 시간 내에 만날 수 있었다. 책을 들고 집에 오자마자 바로 읽기 시작했다. 우선 책 표지 앞면과 뒷면에 적힌 출판사 측의 ‘광고문구’가 그럴싸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고정독자를 확보하고 있다는 일본인 남성 작가 오쿠다 히데오의“조국의 운명에 휩쓸린 세 동급생의 격동의 인생. 이 책은 뛰어난 ‘소녀 소설’이다”라는 추천사 일부가 눈길을 끈다. 왠지 드라마틱한 이미지가 느껴진다.

 

“요네하라의 탁월한 인물 데생 능력이 돋보이는 수작! 소녀시절,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를 다녔던 일본의 동시통역사 요네하라 마리는 격변의 시기를 겪고 있는 동유럽 친구들의 안위가 걱정스럽다. 이 책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의 내면을 들여다 본 논픽션이다. 아무나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동유럽, 이제는 해체되어 잔흔만 남은 그곳을, 저자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로 다루고 있다. 리차, 아냐,야스나 세 친구와의 만남과 이별, 재회에는 동유럽 현대사의 숙명적 아픔과 부정할 수 없는 삶의 긍정이 있다. 추리소설을 읽듯 두근거리고 묵직한 감동이 느껴지는 다큐멘터리!”

 

책날개에는 요네하라 마리(米原万里)라는 저자의 조금은 슬퍼보이는 사진과 함께 간단한 이력이 실려 있다. 1950년 도쿄 출생~2006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대목에서 왠지 뭉클해졌다.

요즘 세상에, 특히 일본처럼 세계 최장수국 국민이 더구나 여자가 56세에 세상을 떴다는 건 요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왠지 ‘프라하의 소녀시대’라는 책도 슬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에는 저자가 1959년~1964년 프라하 중심지에 있는 소비에트학교 시절 친구들과 찍은 사진 몇 장이 실려 있다. 기모노를 입은 소녀시절 저자의 모습에서 감성적이고 예절 바른 한 일본인 소녀의 원형을 보는 듯했다.

 

요네하라 마리는 1959년 말, 부친이 일본 공산당 대표로 ‘평화와 사회주의 제 문제’라는 공산당의 이론정보지의 편집위원으로 선발되어 그 본부가 있는 프라하로 솔가(率家)해 가면서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보내게 된다. 당시만해도 일본에선 공산당원이 매우 귀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요즘도 공산당원은 '희귀한 존재'겠지만 말이다.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까지 ‘골수’ 공산당원이었던 요네하라 마리는 ‘공산당 자녀들’만 다닐 수 있는 소비에트 학교로 전학한다. 마리는 그 곳에서 ‘평생 친구’로 남게 되는 그리스 출신 말괄량이 리차, 루마니아인 거짓말꾸러기 아냐, ‘차가운 도시소녀’ 스타일의 유고인 야스나와 ‘죽마고우’로 지냈다.

 

놀라울 정도로 생생한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력은 감탄스러울 정도다. ‘아스라한 저 너머 유년시절’의 기억을 오롯이 되살리면서 그 때의 친구들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를 스릴 넘치는 필체로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담아내고 있다.

 

부친의 전근으로 프라하에서 다시 도쿄로 돌아온 요네하라 마리는 ‘주관식 위주’의 철학적인 소비에트 학교의 교육 방법과는 정반대인 객관식 주입식 일본교육에 적응하기 위해 고통 받던 이야기도 솔직하게 쓰고 있다.

 

특히 ‘절친 3인방’ 소녀들의 집을 구경하고 난 뒤 상상외로 ‘초호화판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모습에 다소 실망했다는 회고담도 적고 있다. 오로지 ‘인민을 위한 헌신적인 삶’을 살아가야할 공산당 최고위급 간부들의 ‘왕족’부럽지 않은 호화로운 저택과 가재도구 등을 보면서 어린 마리는 이렇게 비판적인 발언을 한다. “각료나 공산당 간부는 자기들뿐 아니라 자식들에게까지도 특권을 향유하도록 하잖아. 맨션이나 별장까지, 서민들과는 딴 세계더라.”

 

요네하라 마리는 생각보다 ‘너무 화려하게 살고 있는 친구들의 부모’와 대지주의 아들이면서도 검소한 생활태도로 일관했던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의 삶을 비교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저자는 또 프라하에 살고 있는 평범한 시민들의 눈에 비친 이 ‘소비에트 학교’가 ‘귀족적 이미지’로 남아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는 고백도 하고 있다.

 

50년 전,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공산당원이 모여 함께 활동했던 프라하에서도 ‘본국의 인민보다 훨씬 잘 살고 있던’ 공산당 간부들의 위선적인 생활태도를 읽으면서 문득 요즘 대한민국에서 목청을 높이고 있는 ‘강남좌파’들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어쩌면 정치인들의 이런 '이중적 행태'는 비단 '강남좌파'들에만 국한되는 건 아닌지도 모르겠다. 현재 한국의 정치인들치고 '민생안정'이나 '서민위주'를 부르짖지 않는 사람들은 없다고 본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진실한 속내'도 그럴까하는 데는 의구심이 든다. 요즘 정치인들을 쫄게하고 있다는 '성완종 리스트'만해도 정치인과 부패스캔들은 불가분의 관계인 듯도 싶다.  

 

이 책은 ‘리차가 본 그리스의 창공’ ‘거짓말쟁이 아냐의 새빨간 진실’ ‘하얀 도시의 야스나’ 등 세 챕터로 나눠, 천진난만했던 소녀들이 처녀가 되고 아기 엄마가 되는 동안 겪었던 신산한 인생살이를 예리한 감성으로 보여주면서 ‘공산주의’가 과연 진정 ‘인민을 위한 이념’인지를 소소한 예를 들어가며 묻고 있다. 물론 저자의 이런 마음을 절친 3인의 소녀는 전혀 모르는 상태로 아쉬움 속에 작별한다. 어쩌면 이 어린 소녀 마리도 일본인 특유의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이중성의 DNA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나보다.

 

저자는 도쿄외국어 대학과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러시아어, 러시아 문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1980년 러시아어 통역협회의 설립멤버로 초대사무국장을 역임, 일본에선 ‘초일급’ 통역사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1990년엔 러시아 옐친 대통령을 수행하며 동시통역을 맡았다. NHK교육방송 프로그램 ‘러시아어 회화’ 강사도 지냈다.

 

이 책이 나올 수 있게 된 것은 NHK가 ‘세계, 내 마음의 여행’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요네하라 마리를 섭외, 출연하면서 ‘방송국의 힘’으로 잃어버린 옛친구들의 주소를 추적하고 그녀들을 만날 수 있게 도와준 덕분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KBS에서 한때 방영했던 유명인사들의 옛 은사찾기나 어린시절 친구 찾기 프로그램과 비슷한 것인 듯하다. 그러니까 요네하라 마리가 출연할 무렵인 1995년 그녀는 일본사회에선 꽤나 유명한 여류인사의 반열에 올라있던 셈이다.

 

1994년 통역의 뒷이야기를 다룬 '미녀냐 추녀냐‘로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수필가로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 후 1996년 ’마녀의 한 다스‘로 고단샤 에세이 상을 받았다.

이 ‘프라하의 소녀시대’도 2001년 '오야 소이치 논픽션 상을 받았다. 심사위원단은 “두려운 작품, 스피드 있게 한 순간에 인간 데생을 하면서도, 행간에서 인물들의 영혼까지 느끼게 해준다. 질투를 일으킬 만큼 대단한 표현력”이라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요네하라 마리는 상복(賞福)이 있는 편이기도 했지만 자신만이 쓸 수 있는 독특한 체험을 담은 내용과 문장력을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들 중엔 요네하라의 수필집은 ‘반드시 산다’는 독자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평생 독신으로 겨우 56세 때 세상을 떠났다는 그녀의 운명이 좀 안쓰럽다.

 

감성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시선을 잃지 않고, 그러면서도 유머감각을 향신료처럼 맛깔나게 쓰고 있는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프라하를 가 본 사람들이나 아직 가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공히 일독을 권유하고 싶은 ‘사랑스런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