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딜런(블룸버그사진)
75세 미국 포크록 가수 밥딜런이 올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어젯밤 뉴스 속보를 보고 좀 어이가 없었다. 시인이나 소설가나 뭐 그런 '순수 글쟁이'가 아닌 대중 가수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건 그야말로 허를 찌른 파격이고 기발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상위원회는 밥 딜런이 “훌륭한 미국 음악의 전통과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상 주는 사람들 마음이니까 뭐라 말하긴 어렵지만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고개를 갸웃둥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 것 같다. '오랜 농담이 현실이 됐다'는 유머아닌 유머가 나돌 정도다. 그래도 가재는 게 편이라선지 오늘 아침 신문에 소개된 한대수나 윤형주 같은 우리나라 포크 가수들과 비틀스 멤버였던 조지 해리슨 록 밴드 U2의 보컬 보노 같은 '그쪽 동네'사람들은 밥 딜런의 수상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문학에 취미가 있는 오바마 대통령도 자신이 밥 딜런의 광팬이라면서 그의 이번 노벨 문학상 수상을 크게 기뻐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오바마 대통령은 트위터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명인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면서 "그는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축하 메시지와 함께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 '라이크 어 롤링 스톤'(Like a Rolling Stone) 등 그의 대표곡 링크도 트위터에 함께 올렸다.
유력 후보로 거명됐던 무라카미 하루키도 "밥 딜런은 음악 그 자체와 세상을 바꿨다고 생각한다. 밥 딜런이 없었다면 세상의 음악은 지금과는 매우 다른 모습일 것이다"는 점잖은 평가를 내놨다. 물론 자신이 수상하지 못한 것에 대해 속으론 좀 쓰리겠지만 하루키다운 평인 듯하다.
재작년 타계한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내 롤 모델은 밥 딜런이다.나는 그의 가사를 통해 인생을 배웠다'고 말할 정도로 밥딜런의 광팬이기도 했다. 하지만 서울 유수 대학의 한 원로 불문학자는 '코미디다, 필립 로스 같은 훌륭한 작가들이 미국에만해도 넘치는데 아무래도 문학이라는 큰 배가 타이타닉호가 돼가는 것 같다"며 밥 딜런의 수상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말하기도 했다.
스코트랜드 출신 소설가 어빈 웰시도 "나는 딜런 팬이지만, 이것은 노쇠하고 영문 모를 말을 지껄이는 히피의 썩은 내 나는 전립선에서 짜낸 노스탤지어 상"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음악 팬이라면 사전을 펴놓고 '음악'과 '문학'을 차례로 찾아서 비교하고 대조해 보라"는 말로 노벨상 수상위원회를 비판하기도 했다.
노벨문학상은 1901년 첫 시상 이래 지금까지 115년 동안 모두 109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이 중 밥 딜런처럼 ‘비문학인’이 수상한 경우가 6차례 있었다. 1902년 독일의 역사학자 테오도어 몸젠, 1908년 독일 철학자 루돌프 오이켄, 1927년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 1950년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1953년 영국 정치가 윈스턴 처칠, 그리고 지난해 수상한 벨라루스 언론인 출신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등이었다. 이들이 수상할 때도 역시 찬반 논쟁이 있었다. 하지만 상이란 주최측이 결정하고 수상자가 거부하지 않는 이상 뭐 그대로 진행되는 것이다. 오죽하면 오바마가 '밥 딜런은 노벨 문학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했을까...
어쨌거나 '삐딱한 딴따라'로 불리며 50년 가까이 반전 인권운동을 펼치며 '인류평화'를 위해 노래해온 원로가수 밥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아무래도 고정관념 같았던 문학의 한계를 파괴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알려진대로 유대계 미국인 밥딜런은 전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한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Knocking' on Heaven's Door)'와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을 발표하며 작사와 작곡은 물론, 노래까지 도맡아서 20세기 미국 대중음악의 대표적 '음유시인'으로 꼽혔다.
10대 시절 랭보의 시(詩)를 즐겨 읊던 문학 소년이었고 영국 시인 딜런 토머스를 사숙해 로버트 앨런 지머먼이라는 본명대신 밥 딜런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해왔다. 아무래도 그 이름 덕분에 저렇게 대성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예명이 멋있다. 아마 '로버트 앨런 지머먼'이라는 긴 본명으로 활동했더라면 오늘날의 그의 성공은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미국 대중 음악의 '대부'로도 불려져온 원로가수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금년 노벨상 수상자들 중 가장 '문제적 인물'로 두고두고 회자될 듯하다.
아래 2008년 우리 블로그에 제가 쓴 밥 딜런을 주제로한 영화 '아임낫데어' 를 다시 소개합니다.
‘아임 낫 데어’, 여섯 명의 밥 딜런을 통해 본 그의 예술세계
사람이나 영화나 그 분위기 자체로 매력적인 경우가 가끔 있다. 미국의 뮤지션이자 작가,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밥 딜런을 모델로 만든 ‘아임 낫 데어(I'M NOT THERE)’는 톱클래스 출연배우들의 연기도 뛰어나지만 영화자체도 상당히 매력 있다.
밥 딜런이라는 미국 가수를 모르는 사람이 봤더라도 영화 전편에 흐르는 귀에 익은 음악과 의미 깊은 대사, 그리고 배우들의 살아있는 연기에서 왠지 ‘멋스럽고 매력적인 기운’을 감지해낼 수 있을 것이다.
135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퍼즐을 짜 맞추듯 요리조리 솜씨를 발휘해 낭비하지 않은 토드 헤인즈 감독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매력의 정체를 간단히 말할 수는 없지만 막연한 호감이나 혹은 근거 없는 끌림 정도라고나 할까. 어떤 경우엔 이유 없이 무조건 좋다는 느낌이 바로 매력의 정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전에는 매력에 대해 ‘이상하게 사람의 눈이나 마음을 호리어 끄는 힘’으로 나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기운이 우리의 감성을 자극해 좋다는 느낌을 선사하는 것이다. 봄꽃향기 같은 것이라고나 해야 할지.
아무튼 어떤 존재에 대해 ‘매력 있다’는 것은 그 이미지에 받치는 최상의 찬사가 될 수 있다.
영화에서 히로인으로 등장하는 배우가 내뿜는 매력은 관객동원의 바로미터가 되기도 한다.
‘아임 낫 데어’는 그 특이한 스타일과 출연배우들의 열연으로 영화적 매력을 더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영화가 신선하다는 말은 좀 진부한 듯하다. 이 영화는 이제까지 보기 힘들었던 아주 독특한 구성방식으로 미국 문화계를 뒤흔들어오면서도 은둔자 이미지를 동시에 갖고 있는 밥 딜런의 다양한 아이덴티티를 관객들과 함께 탐험해 나가고 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밥 딜런이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다. ‘모든 이였으나 아무도 아니었던 단 한 사람!’ ‘나는 당신이 알고 있는 그 누구도 아니다’ 무슨 심오한 선문답 같기도 하고 니체 같기도 한 철학적 뉘앙스가 느껴지는 그런 영화다.
브라운 대학 출신으로 배우 감독 제작 각본 편집 등 영화에 관련된 거의 모든 일들을 직접 경험해온 헤인즈 감독이기에 까다롭다는 밥 딜런도 자신의 전기 영화를 만들겠다는 감독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흰 수염 휘날리며 동양의 현자 같은 풍모로 변한 리처드 기어도 ‘아임 낫 데어’에 출연을 결정한 이유에 대해 “밥 딜런의 음악, 토드 헤인즈 감독, 그리고 좋은 시나리오”를 꼽았다. 시나리오는 물론 재간 있는 이 감독이 직접 썼다.
현존하는 가수를 주인공으로 만든다는 부담감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도 이 영화는 옴니버스나 다큐멘터리처럼 그럴듯하게 현실의 ‘그’가 갖고 있는 이미지를 그가 만들어온 여러 가지 노랫말을 기둥 삼아 아주 멋스럽게 재현해내고 있다. 그의 노래를 잘 몰라도 좋다. 그냥 영화가 흘러가는 대로 그 흐름에 자신을 맡기면 된다.
1960년대 포크 뮤직 붐을 일으키며 데뷔한 밥 딜런은 지금도 ‘정정한 현역’으로 빌 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하는 ‘노익장’의 기염을 토하고 있다. 그의 가사에는 문학과 철학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저항의 기운이 넘실댄다. 그는 헤인즈 감독에게 영화화를 허락하면서 천재성이나 시대적 양심 운운하는 말만은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그에게 덧씌워진 그런 이미지들로 고통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영화에서 “왜 요새는 저항의 노래를 안 만드냐”는 질문에 케이트 블란쳇이 맡은 밥 딜런은 이렇게 외친다. “나의 모든 것이 저항이다” 이 정도의 자신감이 받쳐주어야 한 예술가의 생존은 존엄하게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노래가 어려운 것도 아니다. 다른 분야에서도 ‘경지’에 도달한 예술인들의 작품은 쉬워 보이는 경향이 있듯이 그의 노래도 쉬우면서도 의미 깊게 다가온다. 지금까지 50년 이상 현역으로 전 세계 대중 뮤지션들의 정신적 지주로, 세월을 뛰어넘는 싱어 송 라이터로 그의 존재감은 뚜렷하다.
이런 ‘대가’를 토드 헤인즈 감독은 관객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화려하면서도 특이한 방식으로 재 포장해냈고, 그가 차려 놓은 무대 위에서 종횡무진 누빈 6명의 ‘밥 딜런’ 중 케이트 블란쳇과 리처드 기어가 해낸 밥 딜런의 이미지는 영화보기의 행복감을 만끽하게 해주었다.
리처드 기어는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와 깊은 교류를 해온 덕인지 그의 얼굴에는 동양적인 유유자적이 묻어있어서 보기 좋았다. 그가 출연해온 영화들과는 달리 이 영화에서 리처드 기어는 인생에 달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여배우는 ‘골든 에이지’에서 영국여왕 엘리자베스1세로서의 품위를 탁월하게 재현해낸 원체 연기력 있는 배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 영화에선 최고로 물오른 연기를 보여준 것 같다.
실제의 밥 딜런과 거의 똑 같을 정도로 신기하게도 닮아 보이는 외모적 변장술도 뛰어났지만, 그녀가 뿜어내는 카리스마와 아우라는 대단했다. 여배우로선 드물게 그녀는 ‘화려한 변신의 연기’폭을 꾸준히 넓혀 나가고 있다. 호주의 국립 드라마예술대학을 졸업한 뒤, 줄곧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익혀온 정통파 연기인답게 그녀의 연기는 안정감을 주고 있다.
케이트 블란쳇은 이 밥 딜런을 탁월하게 해냄으로써 영국의 헬렌 미렌이나 미국의 메릴 스트립처럼 호주가 낳은 최고의 연기파 여배우로 등극했다고 본다.
여자가 남자 같다면 자칫 우악스럽거나 거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밥 딜런의 외모가 워낙 섬세한 여성적 분위기가 있어선지 이 영화에서 그녀의 연기는 다른 어느 배우보다 밥 딜런 적(的)이었다는 칭송을 많이 받았다. 그녀는 이 영화로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과 골든 글로브 여우조연상을 비롯, 세계 유수의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밥 딜런의 평범한 전기 영화는 아니지만 밥 딜런은 ‘아임 낫 데어’와 여주인공 케이트 블란쳇을 볼 수 있게 우리에게 영화적 근거를 마련해준 공으로 상을 받을 만하다. 그는 이미 미 주간지 타임이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했고, 2004년 롤링스톤즈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에도 비틀스에 이어 2위로 선정되었다. 무엇보다도 감독 토드 헤인즈의 재능이 빛나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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