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화

일본 영화 '안경' -핸드폰도 안 터지는 유유자적한 슬로우 라이프 제시

스카이뷰2 2017. 1. 24. 15:04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 <안경>의 한 장면. 등장인물 모두가 안경을 쓰고 있다.

 

 

 

 핸드포도 안 터지는 유유자적 슬로우 라이프 제시한 '안경' 

 

 



 독서용 안경을 어디다 뒀는지 깜빡하는 바람에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문득 '안경'이라는 일본영화가 떠올랐다. '슬로우 라이프'를  주제로 편안한 휴식같은  영화를 잘 만들어 내는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을 만난 건 몇 해 전 서울 건대입구 롯데시네마 시사회장에서였다. 당시 그녀는 자신의 세 번째 영화 〈안경〉의 홍보 차 내한했었다. 외국인 감독들이 신작 영화의 한국 개봉을 앞두고 종종 방한하지만 일본 감독들은 특히나 열성적인 것 같다. 


시사회 직전 수줍어하는 표정으로 오기가미 감독이 등장해 무대 인사를 했다. 한 눈에도 상당히 똑똑해 보이는 듯한 여성이었다. 넓은 이마에 큰 눈이 인상적인 이 젊은 여성 감독은 관객들이 자신의 영화를 ‘입소문’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7명의 사람들에게 저의 영화를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말하자면 '영화 마켓팅 세일즈'를 한 셈이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잘 만든 작품이라도 관객이 외면하면 무용지물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오죽하면 우리 영화감독들도 시사회 전날엔 ‘치성’이라도 드리고 싶을 정도라고 말하겠는가.  어떤 남성감독은 부정탈까봐 개봉날엔 면도조차 하지 않는다고 하니 감독들의 '개봉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자부심을 팬들에게 간절히 전하고 싶어하는 심정은 국경을 초월한 보편적인 감정일 것이다. 그렇기에 오기가미 감독이 한국의 젊은 영화관객들에게 '입소문'을 간곡히 부탁한 것도 자신의 작품이 흥행에 성공하기를 바라는 보편적인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일본에선 그녀의 실질적인 첫작품인 '카모메 식당'을 개봉할 때 일반적인 마케팅 없이 입 소문 하나로 수많은 관객을 끌어모았다고 한다. '슬로우 라이프 무비'라는 일본영화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후한 평가와 입소문 덕분이었다. 제작비를 제외한 순 이익이 꽤나 짭짤해, 여성감독이라는 핸디캡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저예산으로 수준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건 어느 나라 감독이든 공감하는 사안일 것이다. 물건으로 치자면 '싸고 질좋은 상품'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구매할 수 있게 하는 것인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물며 예술이라는 '어려운 영역'에서야 오죽하겠는가. '저예산 영화'제작을 잘 할 수 있는 것도 감독의 재주라고 생각한다.   

 

오기가미 감독은 현대인의 ‘소소한 일상 속에 숨겨진 삶의 의미와 따뜻한 감동을 절제된 구성 속에 특유의 유머러스함과 투명한 감성으로 녹여낸다’는 평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우리네 일상을 깔끔한 요리로 만들어 스크린이라는 테이블 위에 근사하게 올려놓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그날 본 영화 ‘안경’도 그녀의 ‘평소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이다.  

 

<안경〉은 해외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아, 2008년 선댄스 영화제, 홍콩영화제, 샌프란시스코영화제 등에 진출해 호평을 받았다. 전작인 ‘카모메 식당’과 비슷한 분위기의 영상미를 보여주고 있다. 깔끔한 화면에 철학적인 화두를 담아 ‘슬로우 라이프, 웰빙 라이프’에 대해 감독 나름의 독특한 시각이 빛나보였다.

 

일본에서 가장 조용하고 아름다운 남쪽 섬 마을 바닷가를 배경으로 영화는 나른한 봄 바다가 주는 매력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 조용한 곳으로 떠나고 싶은 여주인공 타에코(카모메 식당의 여주인공)는 어느 날 문득 ‘우연한 여행자’가 되어 머나먼 남쪽 바닷가 마을민박집에 도착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도시의 세련된 지성인 스타일의 민박집 주인 남자는 “손님이 북적대면 번거로워질까봐 문패를 조그맣게 붙였다”는 말로 도시의 객을 맞이한다.

 

그의 이런 말과 함께 카메라는 민박집 문패를 슬며시 보여주는데, 세상에! 정말 손바닥 만한 문패가 앙증맞게 붙어있다. 감독은 어쩌면 현대판 유토피아를 작은 문패로 상징하고 싶었던 것 같다. 누구의 눈에도 잘 띄지 않는 곳으로 잠시나마 도피하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복잡한 심리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안경을 껴선지 학구적으로 보이는 이 민박집 주인장 남자는 영업보다는 사색을 우선하는 초연한 경영 마인드의 소유자다. 다소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가 영화 전편에 흐르고 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생계 걱정하지 않고 맥주를 마시거나 빙수를 맛있게 먹고, 정갈한 민박집 조찬을 함께하면서 사소한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휴가지의 소소한 일상을 즐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바로 행복의 진수 아니겠냐고 감독은 속삭이는 듯하다. 파랑새이야기처럼 멀리 있는 줄 알았던 행복은 바로 그렇게 ‘시시한 일상’ 안에 숨어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TV도 없고 핸드폰도 열리지 않고 물론 컴퓨터도 없고 화려한 휴양지 시설은 더더구나 없이 오로지 무한대로 펼쳐지는 푸르른 바다만이 있는 그런 오지(奧地)에서 등장인물들은 한결같이 ‘안경’을 낀 채 사색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런 설정 자체가 감독이 원하는 웰빙 라이프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한국에서도 이런 '문명의 이기'를 멀리하는 '템플 스테이'같은게 유행이라고 한다.

 

106분짜리 ‘안경’은 핀란드 헬싱키의 음식점을 무대로 한 전작 ‘카모메 식당’과 상당부분 겹쳐지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식당과 민박집의 이미지도 어딘지 비슷하다. 게다가 낯선 곳으로,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는 도시인의 원초적 속성을 건드려주는 듯한 감독의 재기를 또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아무 ‘알맹이 없는 휴양지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끌어나가는 감독의 저력은 대단해 보인다. 

 

영화가 끝난 뒤, 극장 무대로 올라온 오기가미 감독과 관객 사이에 일문일답이 있었다. 영화전공 대학생들이 많이 참석한 그날 시사회에선 재기발랄한 질의문답이 많이 오갔다. 다소 연극풍의 기법을 채용한 듯한 ‘안경’은 오기가미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까지 썼다고 한다. 그녀는 이 시나리오를 불과 5일 만에 썼다고 말했다. 굉장히 빠른 필력의 소유자같다.

 

‘안경’이란 제목은 어떤 상징성을 갖느냐고 질문하자 그녀는 “별 의미 없이 그냥 붙인 겁니다”라고 다소 겸연쩍은 듯 대답했다. 일본의 가고시마 현의 최남단에 있는 요론도라는 섬이 실제무대라고 소개하면서 이 섬은 일본에서 헬싱키를 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말도 했다. 그렇게 머나먼 섬까지 가서 '문명의 이기'와는 일체 절연한 채 소소한 삶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건 아무나 누릴 수 있는 행복은 아닐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