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드라마 료마전 포스터, 타이틀롤을 맡은 후쿠야마 마사하루
도쿠가와 이에야스 “나는 이렇게 해서 천하를 손에 넣었소.”
몇 년 전 일본의 아사히(朝日) 신문은 ‘지난 1천 년 간의 정치 지도자’에 대한 인기투표를 실시한 일이 있다. 그 결과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사카모토 료마라는 탁월한 검객을 일본인들은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3세에 요절한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인의 영원한 영웅으로 그를 소재로 한 ‘료마전(傳)’이라는 드라마가 수 십 차례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있는 정치개혁가다.
전 일본인의 우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로 소설의 주인공으로도 여러 번 등장했다. 몇년전 NHK TV에서는 톱스타 후쿠야마 마사하루를 료마로 내세운 '료마전'을 방영해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만큼 일본인의 료마 사랑이 대단하는 얘기다. '비운의 영웅'에 대한 사람들의 애틋함도 반영된 것 같다.
이 사카모토의 뒤를 이어 2위를 차지한 인물이 바로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더 많이 알려진 도쿠가와 이에야스이다. 사카모토가 33세에 암살된 데 비해 도쿠가와는 75 세로 천수를 누렸고, 그만큼 ‘업적’을 많이 이뤄 놓아서인지 역사적인 평가는 도쿠가와를 더 비중있게 다룬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일본의 한 경영 잡지에서는 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꽤 재미있는 설문 조사를 한 일이 있다. 자신을 전국시대의 무장으로 비유한다면 누구인 것 같으냐와 후계자로는 어떤 타입의 무장을 택하겠느냐 라는 설문에 대해 최고 경영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1위로 꼽았다. 2위는 오다 노부나가였다.
이 오다라는 사람 역시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언젠가 故김대중전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일본의 역사 인물로 이 사람을 꼽은 덕으로 잠시나마 우리에게 그 존재가 조금은 알려진 일이 있다. 이 오다는 도쿠가와의 의형으로 49세에 암살될 때까지 도쿠가와와는 의리를 잃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도쿠가와에게는 6세 연상인 오다가 늘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해 ‘평등한 우정’을 누린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일본의 최고 경영자들에게는 이 두 사람이 ‘역사적인 교과서’로서 그들의 언행과 업적을 비교하며 ‘반면교사’로도 활용하면서 자신들의 경영지침에 조금이나마 참조하는 대선배들로 모신다는 응답이 나온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인물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우리의 ‘민족적 원수’로 꼽을 수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자신과 동일한 타입이라고 응답한 경영자는 한 사람도 없다는 점이다.
조선을 침공한 주범인 도요토미는 본국에서도 역시 환영받지 못한다는 얘기일까. 그러나 자신의 후계자들 중에는 도쿠가와 보다는 오다나 도요토미 같은 인간형이 많다고 응답하고 있어 일본 최고 경영자들의 고충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원하는 타입의 인간형보다 그렇지 않은 인간형이 많다는 것은 비단 기업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닐 듯 싶다. 일본에만 국한되는 얘기는 더더욱 아닌 듯싶어 시사 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직의 최고 경영자들은 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자기와 동일시하고 그런 유형의 사람을 후계자로 맞이하고 싶은 것일까? 여기에 도쿠가와의 ‘인기 비결’이 숨어 있는 것 같다. 그는 일본에 막부시대를 열고 자신은 “마상에서 천하를 얻었지만 마상에서 정치를 하지는 않겠다”는 평화선언과 함께 “나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은 부하들”이라고 말했다.
‘주식회사 도쿠가와’를 무려 2백60여 년 동안이나 존속시켜 나갈 수 있도록 반석을 다져 놓은 그 철저한 경영 마인드로 인해 후세의 기업 경영자들의 인기를 한 몸에 얻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현대의 기업수명은 그 분기점이 창업 이후 30년이고, 세계 100대 기업 중 한 세기 이상 수성에 성공한 기업은 17개에 불과하다는 조사결과를 참작해 볼 때 도쿠가와 가(家)의 2백 60년 수성의 기록은 현대의 경영자들에게는 경이로운 대상이 아닐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일본에는 이런 가요가 있다고 한다. “노부나가가 반죽하고 히데요시가 만든 천하라는 떡을 간단히 먹어버린 도쿠가와”. 일본 전국 시대를 아주 간단명료하게 말해 주는 노래인 것 같다. 이와 함께 두견새를 소재로 지은 하이쿠(일본 특유의 단시)를 보면 이들 3인의 인생철학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성질 급한 오다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여야 한다”고 읊었고, 꾀주머니로 알려진 도요토미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게 해야 한다”, 참을성 많기로 소문난 도쿠가와는 “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도쿠가와는 한 살 때 생모와 생이별을, 다섯 살 때는 적의 성에 인질로 끌려갔고, 일곱 살에는 부친이 암살당함으로써 사고무친(四顧無親)한 천애의 고아가 됐다. 요즘으로 치면 결손가정의 어린이에서 소년가장이 되어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다. 자칫 비뚤어지기 쉬운 환경이었지만 도쿠가와는 특유의 성실성으로 잘 성장해, 자신의 시대를 연 것이다.
부모의 정은 고사하고 언제 암살당할 지도 모른다는 칼날 위에 서서 하루하루 살아가야하는 처지였기에 어린 도쿠가와에게는 그야말로 ‘참을 인(忍)’자 만이 자신을 지켜주는 보호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에 새가 울지 않으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울 때까지 기다리고야 만다는 그 끝없는 인내심에서 어쩌면 현대의 최고 경영자들은 ‘온고지신’의 비결을 발견해냈는지도 모르겠다. 도쿠가와에 대한 일화는 무궁무진하지만 끝으로 딱 한 가지 소개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손을 닦으려고 들고 있던 종이 한 장이 바람에 날아가자 맨발로 뛰어나가 기어코 그것을 집어 들어 손을 닦았다. ‘구두쇠야’라는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는 가신(家臣)들에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이렇게 해서 천하를 손에 넣었소.” 휴지 한 장이라도 아끼는 마음, 이것이 바로 그의 정치 마인드의 ‘비결’이자 ‘기본’이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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