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김수영의 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와 '달밤'

스카이뷰2 2017. 11. 22. 12:41

[정끝별의 시 읽기 一笑一老] 달밤박상훈 일러스트.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김수영 시 전문.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원 때문에 십원 때문에 일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달밤 -김수영 시

언제부터인지 잠을 빨리 자는 습관이 생겼다
밤거리를 방황할 필요가 없고
착잡한 머리에 책을 집어들 필요가 없고
마지막으로 몽상을 거듭하기도 피곤해진 밤에는

시골에 사는 나는―
달 밝은 밤을
언제부터인지 잠을 빨리 자는 습관이 생겼다

이제 꿈을 다시 꿀 필요가 없게 되었나 보다
나는 커단 서른아홉 살의 중턱에 서서
서슴지 않고 꿈을 버린다

피로를 알게 되는 것은 과연 슬픈 일이다
밤이여 밤이여 피로한 밤이여.



 

  1968 47세 아까운 나이에 교통사고로 숨진 시인 김수영의 시는 그가 썼다는 걸 모르고 읽어도 딱

느낌이 온다. 국문학도도 아니고 김수영의 시를 많이 읽은 편도 아닌데 말이다. 위의 시 '고궁을 나오면서'와 '달밤'도 마찬가지다. 우연히 이 시를 읽어가다가 혹시 '김수영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바로 맞았다. 엊그제 아침신문에서 우연히 봤던 '달밤'이라는 시도 그랬다. 서너 줄 읽어내려가는데 바로 '필'이 왔다. 김수영이 쓴거다... 벌써 50년 전 세상 뜬 이 시인의 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내게 여전히 현대적이고 매력적인 것 같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신랄한 사회비판이 담겨있어 보인다. 1960년대 가난했지만 자존감 강한  

시인의 일상이 눈이 시리게 펼쳐진다.  '50여년 전  어느 날, 가난한 시인은 큰 맘먹고 한 그릇에 오십원 하는 ‘갈비탕’을 사먹으러 어렵사리 식당엘 갔다. 당시엔 ‘갈비탕’은 엄청 고급 음식에 속했던 시절이다. 그런데 그런 귀한 음식에 정작 기름덩어리만 많이 나오고 갈비는 없었으니 울화가 치밀만도 하다. 시인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저 왕궁 대신 왕궁의 음탕대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그만 욕까지 하고 말았다는 거다.

 

그래도 그 시인의 ‘분노’는 진정성도 있고 절절히 이해가 간다. ‘밥’이 안 되는 시를 쓰고 허접한 번역 원고로 근근히 살아가는 적빈(赤貧)의 시인이 어느 날 작심하고 가벼운 주머니를 탈탈 털어 갈비탕을 사먹으러 갔는데 기름만 둥둥 뜬 그런 유사갈비탕 모양의 ‘기름탕’이 나왔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이런 20세기 곤곤한 시인의 분노에 비하면 다 지난 얘기지만 국방장관까지 지내고 나중에 '박근혜 청와대'까지 승승장구했던 김장수라는 인사가 2012년 12월 ‘박근혜 인수위시절’ 식당 밥이 부실하다며 투정했었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세월호 참사'당시 '청와대는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는 '망언'까지 했던 인물이다.


인수위 구내식당에서 '박근혜 당선인'과 함께한 4000원짜리 점심 식사(제육고추장볶음·양배추쌈·된장찌개·계란찜)에 대해서 불평을 쏟아냈다는 거다.  “밥이 영 부실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더 못 먹겠는데? 밥이 부실해서 말야.”라는 게 그 인사의 ‘한탄사’였다. '가난한 시인'의 한탄과는 영 '질'이 다르게 천박함이 느껴진다. 어쩌면 그런 '분에 겨운' 밥투정이 '박근혜 몰락'의 나비효과였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어떤 독자는 이런 댓글을 달았었다. "그 인수위 4천원짜리 밥 나도 좀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 이렇게 쓴 댓글은 그나마 양반이다. 여기에 옮기기 민망할 정도로 '김장수의 밥투정'은 호된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하지만 '가난한 시인' 김수영의 기름 덩어리만 둥둥 떠있는 갈비탕에 대한 한탄은 공감이 간다.  


김수영 시인이 서른아홉에 썼다는 '달밤' 역시 인생을 웬만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그냥 다가오는 내용들이다.  '밤거리를 방황할 필요가 없고  착잡한 머리에 책을 집어들 필요가 없고 ' 심지어 잠을 빨리 자는 습관'까지 생겨버린 중년 문턱의 사람들에겐 '완전 공감'이 가는 내용일 것이다. 


'피로를 알게 되는 것은 과연 슬픈 일이다 밤이여 밤이여 피로한 밤이여'라고 한탄한다는 건 어쩌면 '인생 자체가 슬픔을 기초로한 것'이기에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50년전 세상 뜬 시인의 감수성이 50년이 흐른 요즘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 그게 바로 '문학의 힘, 시의 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