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읽을 거리

일본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 주는 따스한 감동

스카이뷰2 2019. 2. 19. 17:45


박사가 사랑한 수식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 주는 따스한 감동




오랜만에 소설 한권을 단숨에 읽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는 일본 소설이다. 교통사고로 일상생활의 80분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수학박사와 그를 도와주는 가정부 그리 고 그녀의  열살짜리 아들이 등장해 숫자와 일상을 통해 그 세사람의 이야기를 풀어나간 책이다.   

 

 

예전엔 ‘소설읽기’가 거의 취미생활에 가까웠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아마도 세상살이가 소설보다 더 소설적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을 때부터였을까, 아무튼 그쯤에서 소설읽기가 영 시들해졌었다. 정말 수많은 소설을 읽었었는데····

하루하루 생활에 쫓기다 보니 ‘소설읽기’는 점점 멀어져갔다. 소설보다 ‘현실’이 더 놀랍고 더 재밌고 더 슬펐다고나 할까. 인생이란 게 너무 매정한 것이라는 자각에 서글픈 마음마저 들면서도 ‘그것이 인생인 걸 어떡하겠누’하면서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그러다가 무언가로부터 ‘위로받고 싶다’는 심정이 간절히 들던 어느 날, 이 책을 우연히 영풍문고에서 만났다. 이 책의 커버에 실린 광고문구가 그럴싸하게 다가왔다. 예전부터 알고 있던 야마다 에이미라는 여성작가가 ‘지금 누군가에게 가장 권해주고 싶은 너무도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책’이라는 멘트를 남긴 게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이책을 읽고나면 당분간 다른 책이 읽고싶지않다'라는 유혹적인 문구마저 실렸다. 여기에 한술 더떠 "매스컴 서평담당자들이 뽑은 올해 최고의 책" 이라고 한다. 저명 출판 평론가가 "나를 울린 책" 베스트 1위라는 문구도 구미를 당긴다.


아마도 이 책을 번역해 내놓은 출판사에서 ‘이만한 멘트면 독자가 솔깃해 책을 사겠지’라고 겨냥해 내놓은 문구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그 상업용 멘트가 마음에 다가왔다. 일본에선 꽤 알려진 중견여류소설가라는 오가와 요코가 공을 들여 쓴 소설이다. 


정적이면서도 기품이 있다는 평을 듣는 1962년생 이 여성작가의 작품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어 선뜻 책사기가 망설여졌다. 게다가 요 근래 책을 샀다가 읽지도 않고 그냥 책장에 꽂아놓은 책이 한 두 권이 아닌 터여서 구입이 꺼려졌는데 그래도 ‘일본 242개 서점에서 선정한 가장 재미있고 감명 깊은 책’이라는 책 커버에 실린 광고 문구에 솔깃해졌다.

이러니까 상품을 팔려면 무엇보다 ‘광고’가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도 들면서 몇 페이지 넘겨봤다 .
일본 독자들의 반응이라고 소개한 문구도 읽어보니 그럴싸했다. 물론 한편으로는 ‘뻥튀기기’가 심하군 했지만
.  
이 책을 읽은 일본 독자들의 독후감이 이렇게 소개되어있었다.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이었습니다. 나는 수학을 싫어하지만 숫자의 아름다움, 깔끔함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설마 눈물샘을 자극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하고 출근길에 읽다가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단순히 감동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한동안 다른 책은 읽고 싶지 않을 정도이다’

 

뭐 이쯤 되니까 그 소설책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영화 한편 보는 셈 치자, 9천원 투자해서 마음이 따뜻해질 수 있다면 까짓 거 아까울 게 없지. 소설책 한 권 사는데도 이렇게 많은 생각들이 오간다는 사실을 아마도 출판업자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비단 책 뿐 아니라 모든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의 마음이란 이토록 복잡미묘한 것이리라.

아무튼 나는 지갑을 열었고, 책을 사들고 집에 오자마자 읽기 시작했는데 아닌게 아니라 마음이 점점 따스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진귀한 경험’을 오랜만에 했다.
아! 소설 읽으면서 눈물을 흘린 게 몇 해만인지 아득해졌다.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아직 나도 소설 읽으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세대라는 기분에 잠시 ‘행복감’을 느끼기도 했다.

 

아직 늙지 않았다는 증거라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물리적으로 나이먹고 늙어가는 일이야 별 신경쓸 일이 아니지만 '감성'이 늙어간다는 건 왠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 블로그를 찾으신 분들은 어쩌면 이런 ‘소심한 이야기’에 한심해 하실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처럼 강퍅한 세상에 260페이지짜리 길지 않은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흔치 않은 ’ 행복감을 맛볼 수 있었다는 경험은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좀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소재는 좀 특이하다. 영국 켐브리지 대학에서 수학박사를 딴 60대 중반의 ‘박사’는 20년전의 교통사고로 기억의 한계 용량이 ‘80분’이다. 박사는 ‘소수’를 사랑하면서 집에서 홀로 수학연구에 하루하루를 보낸다. 20대 후반의 나는 열 살짜리 아들을 둔 미혼모로 파출부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직업소개소에서 소개해준 이 ‘노(老) 수학자’의 집에 파출부 일을 나가게 되면서 펼쳐지는 소소한 일상과 박사의 수학 사랑이 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수학’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들에게도 ‘수학’이 꽤 재미있게 다가간다고 할 수 있다.

언뜻 들으면 별 재미없는 얘기 같은데 수학에 인생을 걸고 살아온 노 수학자와 열 살짜리 소년의 우정, 그리고 화자인 이 미혼모의 시각에 들어오는 이들의 일상이 눈에 보일 듯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박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것은 소수였다. 그는 소수를 아끼고 어루만지고 온갖 정성을 다하고 존경했다.

 

이 책에는 수학의 기초인 수에 대한 개념정리가 아주 소상하게 나와있다. 작가가 그만큼 참고문헌을 착실하게 스타디한 것이다.  소수를 비롯 완전수 우애수 허수 네피어의 수를 비롯해 오일러의 법칙등

아주 오래전 수학시간에 배웠던 기초수학을 다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작가는 노수학자가 어린 소년을 어떻게 사랑하는가를 이렇게 그리고 있다.“자기반찬이 루트(박사가 지어준 소년의 별명)보다 많으면 박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내게 주의를 주었다. 생선 토막이든 스테이크든 수박이든 제일 좋은 부분을 가장 어린 사람에게 준다는 신념을 끝까지 관철했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른 것이어서 내가 아무리 재미있게 읽은 소설책이라도 어떤 이에게는 ‘별로’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적어도 내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이 소설을 쓴 여성 작가의 ‘따스하면서도 예리한 시각’이 마음에 와 닿았다.

 

와세다대학 출신 엘리트 작가답게 그는 언제나 수많은 자료를 섭렵한 뒤 그 자료를 근거로 빈틈없는 소설을 써나간다는 평을 듣고 있다. 장래가 촉망되는 신인에게 수여하는 아쿠타가와상도 수상한 '쟁쟁한 경력'의 소유자로 문장이 아기자기하고 감칠맛이 있어 소설을 읽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일본에선 이 소설이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언젠가 KBS TV 명화극장에서도 방영했었다.  

따스한 위로가 필요한 가슴시린 독자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