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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와 老시인과 꿈을 찍는 사진관

스카이뷰2 2019. 9. 10. 16:57




 

꿈을 찍는 사진관 표지.                      무라카미 하루키  

            


 꿈을 찍는 사진관과 무라카미 하루키와 老시인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변함없이 좋아하는 ‘제목의 이미지’ 중에 ‘꿈을 찍는 사진관’을 빼 놓을 수 없다. 왠지 울적해 지는 시간에도 이 제목만 떠올리면 그냥 마음이 포근해 지곤 한다.  그 이유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 제목이 풍기는 ‘이미지’에는 막연하게나마 사람을 위로해 주는 분위기가 깔려 있는 듯 싶다. 이루어질 수 없는 어떤 ‘꿈’을 사진으로나마 붙잡아 줌으로써 손에 잡히지 않는 환상의 세계를 현실로 인도해 준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인 지도 모르지만.

 

‘꿈’과 ‘사진’은  어울리기 쉽지 않은 이질적인 요소들 같지만 두 단어 모두 이미지의 화려함을 한껏 뿜어내는것같다. 그래서 ‘행복한 이미지’로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꿈을 찍는 사진관’은 아주 오래전 작고한 동화작가 강소천 선생님이 쓴 동화책의 제목이다. 지금 그 줄거리는 거의 잊어버렸지만 실향민 출신인 소천선생님의 가볼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애틋한 정서가 흠뻑 배어 있는 작품이다.

   

 선친(先親)과 동향(同鄕)에 동창생인 소천선생님은 주옥같은 동화와 청소년 소설을 쓰셨는데 40대 후반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선생님의 작품을 더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 청소년들과 어린이들에겐 참 안타까운 일이다.


요즘에야 핸드폰에도 카메라 기능이 있고, 초등생마저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왔다갔다하는 세상이어서 사진에 대한 신비함이 거의 사라졌지만 기성세대들에게 사진 찍는 일은 자칫 거북한 순간이 되기도 했다. 

 기성세대들은 카메라 앞에만 서면 차렷 부동자세로 굳은 표정을 짓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치즈’니 ‘김치’니 하면서 일부러 웃는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도 근래 들어와서 생긴 풍조 같다. 하기야 아프리카 어느 부족은 요즘도 사진기는 ‘영혼’을 빼앗아가는 기계라고 철썩같이 믿고 절대 사진을 찍지 않으려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무튼 우리나라가 웬만큼 살게 되면서 가족 단위의 해외여행이 늘었고, ‘사진만 남는다’는 속설을 실행하려는 듯 적잖은 여행객들은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하는 게 여행지의 중대사로 등장할 정도가 되었다. 가끔 해외여행을 하다보면 사진찍는다는 게 스트레스로 느껴지기도 한다. 언젠가 이탈리아의 그 유명한 트레비 분수대에서 사진을 찍으려다가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제대로 된 구도를 잡지도 못하고 인파에 밀려 아무렇게나 셔터를 눌렀던 기억이 떠오른다.    

 

흔히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든지 ‘카메라의 눈은 속일 수 없다’든지 하는 말로써 사진이 잘 나왔네 못 나왔네를 품평하는 일이 있다. 대체로 인물 사진을 두고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데 ‘실물’보다 잘 나왔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 말들은 일견 맞기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포토제닉한 얼굴이라면 몰라도 대부분은 사진발이 잘 안나온다는 게 상식이다. 예전 우리 부모세대들 사이에선 '오미아이 사진'이라는 말이 통용됐다. 말하자면 중매쟁이들이 처녀 총각의 증명사진 비슷한 걸 들고 쌍방을 왔다갔다하면서 일단 '인물'이 맘에 드는지를 타진하던 시절의 얘기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강점기 때, 하와이에 요즘 식의 '이주노동자'로 떠난 남자들의 한 20년 젊은 시절 사진이 조선 처녀들에게 전달돼, 사진만 보고 시집간 신부들이 너무 늙은 신랑감을 보고 울었다는 전설같은 얘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사진의 기술이 발달해 ‘합성’하거나 조작함으로써 전혀 다른 인물이 나오는 경우도 비일비재한 것인 만큼 ‘사진’으로 인물을 평가하는 일은 그 인물의 속마음을 제 3자가 왈가왈부하는 일만큼이나 부질없는 것인 듯싶다.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얼굴 사진 찍히는 것을 거의 병적으로 싫어한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그 역시 자신의 실물보다는 사진이 훨씬 못나온다는 주장을 하면서 그 이유로 카메라 렌즈를 향하는 순간 거의 반사적으로 얼굴이 굳어져 버리기 때문이라고 그럴싸한 분석까지 내놓고 있다. 작가다운 얘기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사진이 어쩌다 ‘잘 나왔다’ 싶은 경우에는 예외 없이 강아지나 고양이와 ‘함께’ 사진을 찍었을 때라고 한다. 동물들의 순박한 ‘정서’가 세상풍파에 거칠어진 인간을 ‘위로’해 준다는 얘기일 것이다. 미국의 꽤 유명한 한 작가는 자신의 작품집 표지에 실린 실물보다 훨씬 멋있는 작가사진에 대해 그 ‘비결’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아름다운 것만을 생각하죠. 그러면 누구라도 아름다운 얼굴이 찍힐 겁니다” 이런 ‘우문현답’이 통하는 것이 사진의 세계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진을 찍으면서 아름다운 생각만을 하거나 아니면 애완동물을 어루만지면서 찍을 수 있는 여유라는 것도 사실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언젠가 우리나라 시인들 중에서는 ‘웃어른’ 대접을 받고 있는 한 노(老)시인을 만난 일이 있다. 연세에 어울리지 않게 여전히 ‘미남의 분위기’를 갖고 있던 노시인은 자신의 시보다 더 멋있는 인생철학을 들려 주셨다.

 

아직 젊은 애송이었던 나는 노시인의 ‘인품’에 매료되어 이 분의 시적 화법(話法)을 어떻게 하면 잘 쓸수 있을까 속으로 고민을 할 정도였다. 서양 속담에 ‘끝이 좋아야 모든 게 좋다’는 말이 있듯이 노시인과의 대화가 끝날 무렵 나는 그 분의 ‘부탁 말씀’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노시인은 정색을 하면서 자신의 사진을 멋있게 찍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그 멋있는 사진을 한 장 보내달라고 주문하시는 것이었다.

 

너무도 ‘인간적’인 노시인의 부탁말씀에 조금 전까지 가지고 있던 ‘무한대의 존경심과 환상’에 다소 주름이 잡히는 순간이었다. 물론 지금 같으면 그런 부탁말씀 정도야 오히려 그 분을 인간적으로 돋보이게 만드는 조미료쯤으로 여겼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이후 노시인의 잘 찍힌 인물 사진을 볼 때마다 그 날의 일들이 어김없이 떠오른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는 말이 가장 평등하게 적용되는 분야중의 하나가 바로 이 사진에 관련된 것이라는 생각을 혼자 해보곤 한다. 실물보다 잘 찍히고 싶다는 게 인지상정이라는 건 예나 지금이나 어느 누구에게나 거의 비슷한 바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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