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꾼 백남준’의 상쾌한 어록들
설날 연휴 때 아메리카로부터 날아온 ‘백남준의 부음’은 마치 친족의 부고처럼 가슴을 에었습니다. ‘볼 수 없어도 그 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위안을 주는 존재 하나가 이 지상을 떠났다는 사실에 인생의 비애를 느끼는 것이 바로 ‘살아있는 자’가 느껴야할 몫인 듯했습니다.
아무런 인척관계도 아니지만 가끔 매스컴을 통해 전달되는 그의 ‘천재성이 담긴 어록’들은 때때로 삶의 활력소가 되곤 했거든요.
살아생전에 만난 일은 없었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지구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괴이한’ 그의 행적들에 대한 기억이 아슴프레하게 떠오르면서 한 예술가의 삶과 예술이 일반인에게는 비타민처럼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기억에 남아있는 예술가의 오래전 모습은 주로 신문 사회면에 외신발(外信發)로 백 아무개가 특이한 행위예술을 하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는 종류의 뉴스였습니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지금 신문에 소개된 그의 지난 연보를 보니 그게 바로 무어맨이라는 여성 첼리스트와 반나(半裸)로 뉴욕의 멋쟁이 관객들 앞에서 퍼포먼스를 했다는 내용이더군요.
아무튼 백남준에 대한 기억의 시작은 그렇게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있습니다.
1984년이던가요, 서울과 뉴욕과 파리를 동시에 잇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그의 작품과 함께 새해 벽두를 장식하면서 “예술은 사기야 고등 사기”라고 외쳐대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아마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백남준이라는 사람’을 확실하게 알게 된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한 인터뷰 기사들을 이것저것 읽어보니까 역시 ‘백남준은 천재 예술가’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세상을 유랑하며 ‘영원한 이방인’의 삶을 살아내면서 그가 말한 인생에 대한 ‘어록’들을 보면 힘이 나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뭐랄까요, 인생의 쓸쓸함 같은 것을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됩니다.
예술이 사기라고 외친 그는 예술가에 대해서도 “익은 밥 먹고 선소리 하는 존재”라고 정의합니다.
예술에 대해 ‘심드렁하게’ 말하는 그를 보면 대가의 경지가 새삼스럽게 느껴집니다.
일반인들이 ‘어렵고 골치 아프게’ 여기기 쉬운 예술과 예술가에 대해 그와 같이 간단명료하게 정의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숙려(熟慮)기간’을 거쳤다는 얘기이기도 할 겁니다.
그는 예술에 대해 이런 말도 했습니다. “예술이라는 게 사실은 사고파는 문제와 다름이 없는데, 예술은 맹그는 놈은 4백만 명이 만들고 있는데, 그것을 사는 놈은 4명도 안되거든. 그런데 텔레비는 4개 회사가 4백만 대를 만들고, 또 사는 놈도 몇 백만이나 된다. 예술이라는 게 본래 생활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이 많이 진보되면 보통 오락으로는 성에 안 차니, 그때부터 고도의 물건을 찾는 것이지. 취미의 고급이 예술 시장인 셈이야’
백남준은 어쩌면 예술에 대해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경영 마인드’를 가지고
접근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예술가든 예술로 ‘생활’을 해결해 나가야 하는 문제에 부닥치다 보면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는 뉴욕의 한 전시장에서 만난 한국인 젊은 화가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작품을 싸게 팔고 개막식 파티를 많이 찾아 다녀야 하며, 여행을 많이 다니되 작품과 함께 다니라”
이 말은 ‘예술로 생활까지 해결해 나가야 하는’ 후배 예술가에게 자신이 터득한 ‘비법’을 전수해 준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예술로 인생을 살아가는 일’이 험난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을 그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한 마디’ 해달라는 부탁을 받자 이렇게 말했답니다.
“재수가 좋아야 돼” 대가의 말치고는 너무 뜻밖이죠? 하지만 인생이 원래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말로 들립니다. 인생에는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부분’도 많으니까요.
그의 말을 듣다 보면 인생을 ‘흐르는 물’처럼 여기는 천재 예술가의 ‘탈속의 경지’를 감지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96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휠체어 신세를 지면서도 그는 ‘지금 무엇이 제일 하고 싶냐’는 질문에 서슴없이 ‘연애’라고 답했다는 군요. 예술가다운 발언이죠.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천재라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는 “나 천재 아니야, 바보야 바보, 미친 놈”이라고 했답니다.
그는 입버릇처럼 ‘병’이 나으면 ‘연애’를 할 것이라고 말했고, 젊은 여자들이 보고 싶다는 말도 했답니다. 늘 곁에서 헌신적으로 병간호를 해오던 ‘뚱보 아내’가 들으면 너무 서운한 말들이겠죠.
하기야 같은 비디오 아티스트였지만 백남준의 그늘에 가려 빛을 못 본 그의 일본인 아내는 “그가 쓰러지고 나서야 진정한 허니문이 온 것 같아요”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의 ‘연애 활동’은 왕성했다죠. 오죽하면 그의 부인이 ‘모든 통장을 압류할 정도’였지만 그는 연애를 통해 ‘예술적 영감’을 무한히 얻어낸다는 주장을 했답니다.
그들의 ‘결혼이야기’도 꽤 사연이 있더군요. 동경대학출신인 백남준이 ‘금의환향’식으로 일본 동경에 공연하러 왔을 때 지금의 부인은 ‘백남준과 결혼할 결심’으로 의도적으로 접근했고, 그를 따라다닌 지 14년 만에 드디어 ‘웨딩마치’를 울린 집념의 여인이었답니다. 45세에 만혼을 한 그는 “시게코가 불쌍해서 결혼해줬다”고 말했다는군요.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그의 아내는 “이제 내가 할 일은 어떻게 해서든 저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헌신적으로 남편을 보살펴왔다고 합니다. 백남준으로서는 말년에 ‘처복’을 누린 셈이라고나 할까요.
서울 토박이인 그는 조국을 떠난 지 30여 년만에 귀국했지만 ‘깍쟁이 같기도 하고 정겹게도 들리는’ 서울말씨를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아 화제가 되기도 했었죠.
그는 서울에서 보고 싶은 사람으로 작은 누이를 꼽으면서 “백영득이 못 본 지 오래됐어. 다리가 아프대, 뼈다귀가 부러졌다고”라고 했답니다.
생전에 그는 ‘영어로 자서전을 쓰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이루지는 못하고 말았습니다.
74세로 영면한 그는 생전에 ‘한 팔십까지는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했다는데요,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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