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동네 백화점에서 만난 황석영

스카이뷰2 2006. 2. 8. 21:01
 

동네 백화점에서 만난 황석영 


어제(7일)  소설가 황석영을 동네 백화점에서 만났습니다. 아니 우연히 보았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죠. 그는 국내에서는 ‘최고의 필력’으로 꼽히는 작가의 한 사람으로 글 못지않게 기이한 ‘사건적인 행적’으로도 유명하죠.


그저께 한 신문에는 황석영 씨가 현재 ‘프랑스 파리의 미라보 다리 근방의 한 아파트에서 집필과 대외활동을 숨 가쁘게 펼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더군요. 그런데 바로 하루 뒤인 어제 그를 제가 사는 동네의 백화점에서 딱 마주치는 ‘사건’이 벌어졌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죠.


원래 사람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저는 처음에는 ‘비슷한 사람’이겠지 생각했습니다. 5층 남성복 코너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는 ‘설마’했었죠.

‘파리에서 집필에 몰두 중’이라는 사람이 우리 동네 백화점을 배회한다는 게 연결이 잘 안 됐거든요. 


60대 중반의 나이에도 운동선수 같은 머리 모양에 캐주얼한 복장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나이 도망은 못한다는 옛말처럼 ‘노년의 티’까지는 감추지 못하는 것 같더군요.


아무튼 전혀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유명작가’를 만나자 저는 또 ‘오! 블로그’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우리 ‘skyview 의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방문객들을 위해서라면 ‘신선한 재료’를 발굴해 재미를 선사하고 싶다는 게 저의 작은 소망이거든요.  


물론 그는 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할 지도 모르겠지만 한 20여 년 전 신문사의 잡지 파트에서 일할 때 그가 쓰는 연재소설을 담당한 인연으로 그의     소설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말하자면 ‘일’로 읽은 셈이죠. 교정을 보는 차원에서. 읽다보니 꽤 재능 있는 소설가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황석영이 월남전을 소재로 한 소설을 잡지에 연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뉴스’가 되었습니다. ‘무기의 그늘’이라는 제목의 그 소설은 연재를 시작하면서 대번에 화제를 모았던 기억이 납니다.


하도 오래전 일이어서 자세한 기억은 거의 안 나지만 황씨가 ‘마감시간’을 너무 안 지켜서 매달 골탕을 먹었던 건 지금도 선명히 떠오릅니다.

그때 그는 전남 광주에서 살고 있었는데 매월 마감이 가까워지면 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홍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제발 원고를 빨리 보내주시라고 독촉전화를 하곤 했습니다.


이 부인은 성격이 쾌활하고 친절해서 아주 재미있게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황씨와 이혼 한 후 홍 여사는 소설로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5·18 광주 시민항쟁’을 서정적인 문체로 그렸던 작품이었죠. ‘원고 독촉’으로 친해진 이 부인은 저보고 광주에 꼭 한 번 놀러오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작가가 한 작품을 써 낸다는 건 아마도 몹시 어려운 일일 거라는 데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그렇게 마감기일을 못 맞춰주는 게 당시로는 꽤 짜증나는 상황이었습니다.


기억에서 가물가물하지만 황씨는 그렇게 번번이 마감을 어기더니만  끝내 연재소설을 중단하는 ‘사태’를 빚고 말았습니다. 공신력 있는 잡지의 이미지에 ‘먹칠’을 한 셈이죠. ‘작가사정으로 중단합니다.’라고 사고(社告)는 내보냈지만 그 당시 황씨에 대해선 그리 썩 좋은 인상을 받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어쨌거나 그 후 업무파트가 달라져 더 이상은 황석영씨와 마주할 일은 없었지만 1989년 그가 문익환 목사와 함께 방북해 김일성과 찍은 사진이 공개되면서 사회적으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죠.

지금이야 남북을 오고가는 게 쉬워졌지만 ‘공안정국’이었던 당시로서는 유명작가의 ‘방북’은 나라를 흔드는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방북사건’으로 황씨는 한동안 한국에 못 들어오고 베를린 뉴욕 등을 떠돌았죠. 그 무렵 그의 두 번째 부인의 부친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유명한 조각가였던 그분은 ‘사위의 행적’에 대해 못마땅한 심정을 토로하더군요.

고전무용을 전공한 그 부인과도 결국은 헤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황석영씨는  1993년인가 서울로 들어와 7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다가  98년 특사로 풀려났습니다. 그 후 그는 “오래된 정원‘ 손님’ 등의 장편소설을 연달아 발표하며 지금까지 활발한 문학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해인가요, 황석영씨가 20년 연하의 여성과 결혼한다는 기사가 여성지들을 장식했습니다. 아무래도 예술가는 보통사람들과는 남다른 데가 있나봅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인생 자체가 ‘소설적’인 셈인 거죠.


개인적으로는 파란 많은 인생을 살아왔지만 어느 인터뷰에서 보니까 그는 스스로를 ‘운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더군요. 문득 며칠 전 작고한 백남준선생이 떠올랐습니다. 백 선생은 무릇 예술가들은 ‘재수가 좋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황씨도 ‘재수가 좋은 예술가’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봐야 할까요.


아무튼 우연히 마주친 황석영씨를 보니 이런저런 옛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20여 년 전 ‘담당 필자’를 이렇게 동네 백화점에서 ‘조우’하니 반갑기도 했습니다.

 

인사를 할까 말까를  망설이면서 그와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니까 5층에서 4층 3층 2층까지 제가 따라간 셈이죠. 그는 캐주얼에 관심이 있는지 2층에서 옷 구경을 하더군요.


저도 빈폴 매장에 들어가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한 편으로는 ‘유명작가’쪽으로 신경을 계속 보내고 있었죠. 웬만하면 누군가가 나를 주시하게 되면 금세 감지되는 법인데 그는 전혀 눈치를 못 채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까지도 저는 ‘인사를 해, 말아’로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블로그’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아는 척 하고 유명작가와 ‘미니 인터뷰’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만 왠지 선뜻 내키지 않았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백화점 매장의 점원들과 손님들 가운데 작가 황석영을 알아보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만약 안성기나 하다못해 텔레비전의 단역배우였다면 어지간한 사람들은 알아볼 텐데, 아무래도 ‘동네 백화점’이다보니까 당대의 유명작가를 알아보는 ‘눈’이 없었나봅니다. 작가에겐 조금 씁쓸한 경험일지도 모르겠죠.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1층까지 ‘함께’ 내려왔습니다. 평일이어선지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저와 작가 두 사람만 에스컬레이터에 서 있었습니다. 그의 뒷모습을 보니까 좀 외롭고 쓸쓸해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늙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은 그렇게 조금은 초라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백화점 밖으로 나가는 작가 황석영을 보면서 그냥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파리에서 집필 중’이라는 그의 근황을 알았고, 또 여기 우리 동네에서 저렇게 쇼핑하는 작가를 보니까 그냥 그것으로 ‘인터뷰’는 다 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소설이 잘 안 팔린다는 요즘 세태에서 그래도 60대 중반까지 작품 활동을 한다는 자체가 대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황석영씨 본인은 20여 년 전 ‘담당 기자’가 자신의 뒤를 스토커처럼 따라 다녔다는 건 전혀 몰랐겠지요. 이런 사실 하나만으로도  블로그를 장식할 수 있다는 게 자못 유쾌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이제 며칠 있으면 일간 신문 문학면에 ‘잠시 귀국한 황석영 인터뷰’가 실리겠죠.

신문보다 먼저 이런 글을 올릴 수 있는 것도 ‘재수 좋은 일’같군요.^^    

 

*PS:이 에세이를 쓴 후 한 인터뷰에서 황씨는 "김일성주석을 이순신이나 세종대왕과 같은 반열의 위인이라고 말해 저를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부모님이 이북출신인 저로선 김일성주석을 그렇게 말하는 것에대해 이해하기가 어려웠지요. 6,25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국민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지금 북한의 경제는 어떻습니까! 그것 하나만으로도 김일성을 위인 운운 하는건 저같이 평범한 사람들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거죠.  그 이후로도 황씨는 문학외적으로 종종 요상한 발언을 골라하는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보도되곤 했죠. 작가는 작품만으로 말을 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반인이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활이나 발언을 너무 자주하게 되면 그 사람을 신뢰하기 어렵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