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국민배우' 안성기를 광화문에서 만나다

스카이뷰2 2006. 2. 4. 20:03
 

    

     ‘국민배우’ 안성기를 광화문에서 만나다


24절기 가운데 그 이미지가 가장 멋스러운 입춘(立春)날입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두 글자 한자로 표시되는 절기 가운데 이 입춘이라는 단어처럼 이미지가 풍성하게 다가오는 절기는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뭐랄까요, 연둣빛 생명력 같은 게 느껴지면서 로맨틱한 환상마저 불러오는 그런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또 참 묘하죠, ‘입춘 추위’라고 해서 요맘때면 한차례 맹추위가 기승을 부리죠. 어쩐지 인생사의 다채로움을 암시해주는 듯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오늘 입춘날도 굉장히 추었습니다. 한낮에도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가 맹위를 떨치더군요.

우연히 들은 라디오 정오 뉴스에서 오후 1시부터 영화배우 안성기 씨가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1인 시위를 한다는 소식이 나왔습니다.


입춘에 시위라. 그것도 주말 광화문 한 복판에서. 당연히 호기심이 당기더군요.  우리 ‘skyview 의 블로그’ 독자들을 위한 ‘주말 서비스’ 차원에서 당연히 광화문으로 출동하기로 했습니다.


2시 좀 넘어 시위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휑한 찬바람이 지나가는데 어쩐지 안성기 씨가 없을 것 같더군요. 예전에 다니던 직장관계로 그 동네지리는    훤한 터라 한 눈에 주변 환경을 조망할 수 있었지만 안성기 씨는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 순간 스치는 작은 실망감이란.....


날씨가 너무 추워서 연기되었나보다 라고 이해하려는 입장이었지만 그래도 왠지 서운해지더군요. 추운 바람을 피해 면세점 빌딩 안으로 들어갔더니 중국인· 일본인 관광객들로 꽤 붐볐습니다.


면세점 정문 안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제 옆에 서 있던 한 중년 아줌마가 혼잣말로 “오늘 안성기가 여기서 시위한다고 하던데”라고 중얼거렸습니다. 물론 저에게 간접화법으로 물어보는 것이었겠죠. 맞장구치기도 좀 민망해서 그곳을 나왔습니다. 

하여튼 안성기 씨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아무려나 이렇게 추운데 나오는 것도 좀 이상한 거지, 어쩌면 연기됐다는 뉴스를 내가 못 들었을 것이다, 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저의 ‘놀이터’인 ‘교보문고’로 갔습니다.


‘교보문고’ 예전에 신문사 다닐 때 하루도 빼놓지 않고 들렸던 저의 ‘사적인 놀이터’였답니다. 교보문고가 개관하던 날 동료들과 함께 우르르 갔던 기억이 아슴프레하게 떠올랐습니다. 게다가 제가 쓴 책이 처음 진열된 곳도 바로 교보문고여서 교보는 제게 ‘연인’처럼 느껴지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토요일인데도 책방에  이렇게 사람이 북적인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문화수준’이 그만큼 향상된 것이라고 혼자 생각해봤습니다. 거의 명동 한 복판을 걷는 것처럼 인파로 붐비는 교보에서 오랜만에 ‘책구경· 사람구경’을 실컷했습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계속 ‘안성기 씨’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더군요. 아무튼 ‘허탕’치게 했다는 점에서, 평소 ‘믿음성 가는’ 배우로 생각했는데 좀 실망감이 들었습니다.


너무 추운 날씨니까 이해하자는 마음을 또 먹고 광화문 쪽 지하도로 나오는데 교보생명 정문 쪽에 10여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게 보이더군요. 직관적으로 안성기가 저기 있다라는 느낌이 왔습니다. 


4시가 다 된 시각에 안성기는 그곳에 노란 피켓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이미 한 젊은 청년이 그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습니다. 체면불구하고 바싹 옆에가서 서 있었습니다. 그래야 저도 몇 마디 물을 수 있으니까요. 어디 소속인지는 모르겠지만 카메라맨들도 10여명 넘게 있더군요.


청년이 인터뷰를 마치자 바로 안성기 씨에게 다가갔습니다. 화면에서 늘 봐왔던 배우여선지 아주 친한 사람을 만난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더불어 블로그 독자들에게 현장소식을 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답니다.


그에게 다짜고짜 왜 동화면세점 앞에서 하지 않고 이곳에서 하느냐, 안 하는 줄 알았다고 했더니 그는 매우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다른 팀들이 거기서 먼저 하니까”라며 말했습니다. 아닌게아니라 아까 그곳에서는 ‘황우석박사를 지지하는 모임’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리기 시작했고,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국민배우’는 검은색 파카를 입고 장갑도 끼지 않은 채  피켓에 손을 얹고 있었습니다. 노란 피켓에는 “문화는 교역의 대상이 아니라 교류의 대상입니다. 영화배우 안성기”라고 씌어져 있더군요.


‘스크린 쿼터 사수 영화인대책위 공동위원장’이라는 긴 직함을 갖고 있는 안성기 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국민배우’입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추운 입춘날 광화문 한복판에서 오들오들 떨며 ‘1인 시위’를 펼치고 있는 게 안쓰럽게 여겨지기도 했지만 ‘집안에 무슨 일이 닥쳤을 때 묵묵히 해결해 나가는 장남’의 이미지가 읽혀져 ‘인간 안성기’에게 신뢰가 가더군요.


그에게 대뜸 “스크린 축소에 대한 정부지원책이 4천억 원이나 된다는 것에 대해 국민여론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고 운을 뗐습니다.

문화계 일각에서는 정부가 왜 영화계만 그렇게 지원을 많이 해주느냐는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는 얘기도 덧붙였습니다.


며칠 전 문화부 장관은 현행 146일인 스크린 쿼터를 73일로 줄이는 대신 정부가 향후 5년 동안 영화계에 4천억 원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발표했지만 영화계에서는 ‘미봉책’이라며 반발하고 있다는 겁니다.

  

안성기 씨는 ‘국민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대목’에 대해 아주 송구스런 표정으로 말문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인도나 중국 같은 나라에서는 여전히 국가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일본 영화 전용관’이 있습니다”라고 국제 영화계 사정을 말하더군요. 


그는 일반 국민들은 잘 모르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면서 영화는 ‘제작과 배급’의 두 축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배급’쪽의 문제가 이면에 가려져있는데 미국 측에서 이 배급망을 ‘장악’하는 날이면 우리 영화계는 유지해나가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우리 영화가 경쟁력이 높아지지 않았냐고 반문했더니 아무리 경쟁력이 높아진다 해도 ‘스크린 쿼터’가 없어지면 우리 영화계는 서서히 고사해 갈 것이라고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하더군요.


그는 요즘 잘 나간다는 ‘왕의 남자’를 예로 들면서 “만약에 스크린 쿼터가 없어지면 왕의남자 같은 영화는 영화관에 걸리기 어려워집니다. 사극이죠, 유명배우가 없죠, 그런 식으로 따지면 수준 높은 한국영화가 자리를 잡을 확률이 희박해지게 되는 겁니다” 


그는 지금 ‘한국 영화’가 대표선수로 먼저 매를 맞는 형상이지만 이런 사태는 텔레비전 공중파 방송에도 곧 닥칠 위기이며 우리 문화계 전반이 ‘미국의 주도권’아래 장악될 날이 올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안성기씨는  멕시코의 예를 들면서 멕시코가 미국과 ‘나프타 협상’을 맺으면서 자국의 영화를 보호하지 않아, 잘나가던 멕시코 영화가 이젠 그 명맥마저 이어가기 어려운 실정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멕시코문제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게 ‘국민배우’의 주장이었습니다. 반면에 인도의 경우 국가에서 철저히 지원해주는 덕분에 인도영화는 계속 발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국민지지 여론’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게 영 걸렸던지 계속 ‘영화만의 일이 아닌 우리 문화 전반’에 대한 ‘공략’이라는 걸 강조하더군요.

날씨가 너무 추워서 더 이상 ‘공격적인 질문’을 하는 것도 미안해졌습니다.


아역배우로 1957년에 데뷔해 지금까지 90편 가까운 영화에 출연해온 그는 ‘가슴 설레게 하는 매력’을 지닌 남배우는 아니었지만 늘 ‘연기 잘하는 좋은 배우’로 우리와 함께 있어왔습니다. 그런 그도 이제 어느새 50대 중반의 중후한 나이가 되었더군요.


“요샌 영화에 안  나오세요”라고 묻자 그의 얼굴에 금세 생기가 피어났습니다. “왜요, 하고 있습니다. 한반도라고, 거기서 대통령 역으로 ”그렇게 말하는 국민배우 안성기를 보니 ‘영화하는 일의 매력이 바로 저런 것’이로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지막으로 그에게 이런 심술궂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 이렇게 시위를 하면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는 좀 쑥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답했습니다. “아니오, 효과는 별로. 하도 답답하니까. 이렇게라도 나와 있는 거죠” 

오후 1시부터 시위를 하고 있다는 그는 오늘 오후 5시까지 그곳에서 계속 시위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효과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국영화계의 발전을 위해 답답한 마음으로 나섰다는 ‘국민배우’ 안성기씨를 보면서 ‘세계화’라는 거대한 풍랑 앞에 표류하는 나룻배의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잘 되지 않겠어요. 힘을 내세요, 안성기 씨! 입춘대길이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