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밤 ‘연애시대’를 마감하면서
‘사랑이란 뭘까?’ 이런 대명제를 ‘숙제’로 내준 채 ‘연애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월드컵 평가전 축구를 보고 내쳐 텔레비전 앞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오랜만에 집중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드라마에 빠져있던 것도 괜찮은 ‘삶의 재미’였습니다.
지난 4월 초부터 시작한 이 16부작 드라마 ‘연애시대’는 ‘드라마 보기’라는 일상의 소소한 재미를 듬뿍 선사한 채 그렇게 막을 내리면서 그런 숙제를 내 준 겁니다. ‘사랑이란 몰까?’
봄밤을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연애시대’가 준 큰 선물이었습니다. ‘연애시대’를 마감하면서 문득 이런 유행가 하나가 떠오르더군요.
“사랑이란 두 글자는 외롭고 흐뭇하고
사랑이란 두 글자는 슬프고 행복하고
사랑이란 두 글자는 씁쓸하고 달콤하고
사랑이란 두 글자는 차갑고 따뜻하고
사랑이란 두 글자는 쓸쓸하고 화려하고
사랑하는 기쁨에 태양이 빛나고
사랑하는 슬픔에 달빛은 흐려지네
사랑이 올 때면 당신의 웃음소리
사랑이 갈 때면 당신의 울음소리
사랑이란 두 글자는 길고도 짧은 얘기”
1970년대 초인가요, 한창 날리던 패티 김이 남편 길옥윤이 작사·작곡한 이 노래로 장안의 레코드 값을 올리던 노래였죠.
지금 들어도 세련되고 쿨한 멋이 느껴지는 ‘사랑곡 계보’ 중에선 톱을 차지하는 노래였다고 감히 평하고 싶습니다.
사랑의 ‘이중성’을 이렇게 절묘하게 요약해 놓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작고한 길옥윤에겐 ‘천재’라는 헌사를 바치고도 남는 일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좀 거창하게 말해서 인류의 역사와 함께 고락을 같이해온 이 ‘사랑’이란 괴물은 우리 인류가 험난한 ‘지구생활’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절대적생존환경’을 조성해온 일등공신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이 ‘사랑’이 없었다면 아마도 인류는 일찍이 ‘공룡들처럼’ 지구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뚱맞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연애시대’를 첫 회부터 본 건 아닙니다. 아마 2회째부터였죠.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예쁘장한 여배우’ 손예진과 ‘왕의 남자’에서 주인공격으로 나왔던 감우성이 왔다갔다 하길래 무심코 보기 시작했던 겁니다.
그러다가 어쩐지 ‘순수 국내작품’은 아니라는 심증을 갖게 되었고, 어딘가 ‘일본적인 섬세함’을 느끼면서 빠져들었던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저의 그 심증은 들어맞은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연애시대’라는 동명의 일본 소설을 각색해서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어쩐지...
여기저기서 ‘일본풍’의 세련미가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친일파’는 아닙니다. 단지 일본소설을 이것저것 읽어오다 보니까, ‘소 뒷걸음치다 뭐 하듯’ 오랜 감(感)으로 알아맞춘 겁니다.
어쨌거나 ‘연애시대’를 만든 영화감독 한지승의 솜씨가 브라운관에선 처음으로 그 빛을 발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어제 드라마가 끝나고 여러 스태프들이 나와 ‘사랑이란 몰까?’ 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장면들이 나오는데요, 당당한 외모의 한 감독이 ‘몰라’라는 단답형대답을 내놓고 수줍은 듯 사라지는 장면도 걸작이더군요.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연애시대’는 2006년도 ‘최고의 드라마’가 될 확률이 높은 것 같습니다. 물론 순전히 제 개인적 생각입니다만.
시청률은 17%정도로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수준 있는 드라마’라는 걸 감안한다면 17%의 시청률은 꽤 높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원작이 일본 소설이란 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 어쨌거나 재료의 원산지는 일본이라도 한국인 요리사가 맛있게 만든 거니까 별 상관은 없다고 봅니다.
게다가 원산지인 일본에 이미 ‘수출 계약’까지 맺었다니까, 우리 드라마의 ‘우수성’을 알리는 신(新)한류 드라마로 뜰 확률도 높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일본에선 ‘겨울연가’이래 ‘대장금’이 또 대박을 터뜨리며 일본 안방을 장악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소소한 걸 즐겨하는 취향이 있는 일본인의 구미에 이 ‘연애시대’는 안성맞춤일 것 같습니다.
‘연애시대’는 알려진 대로 좀 특이한 소재의 드라마입니다. 이제까진 거의 없었던 내용이지요. ‘젊은 부부’가 무슨 사연으로 ‘이혼’은 했지만 늘 서로의 근처에서 맴돌다가 결국엔 재결합하게 된다는 게 큰 줄거리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소개했던 유행가처럼 ‘길고도 짧은 얘기’인 셈이죠.
그런데 ‘스위트’한 여배우 손예진과 그의 전남편 감우성,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주변인물들이 차려내는 ‘말잔치’는 하나하나 기록해두고 싶을 정도로 ‘주옥같은’ 게 많았습니다. 장면 하나하나도 어찌나 예쁘게 신경 써서 만들었는지 보면서도 ‘고마울 지경’이었답니다.
오늘 아침 신문에 보니까 우리나라 경제규모가 드디어 ‘세계 톱 10’에 진입했다는 소식이 실렸던데, 경제가 잘 되면 모든 분야에 골고루 영향을 미치듯, 이 TV드라마 부문도 이젠 업그레이드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한국 TV드라마의 ‘지존’이라고 불릴 정도로 파워가 대단했던 김수현의 드라마들은 재미가 아주 없는 건 아닌데, 늘 등장인물들이 서로를 피곤하게 만들고 신경질이나 부리면서 짜증이나 내는 게 주종을 이뤄, 그녀의 드라마는 아무리 시청률이 높아도 보질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연애시대’를 보면서는 이제 우리나라도 젊은 작가와 감독들의 ‘재능’이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듯’ 그렇게 발전해 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재능’의 첫째 조건으로 저는 지루하기 쉬운 인간의 ‘일상(日常)’, 그 자체를 소재로 맛깔스럽게 밥상을 차려 내놓을 줄 아는 ‘솜씨’를 꼽고 있거든요. 이 ‘연애시대’가 바로 그런 소재였지요. 그냥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젊은 그들’의 순간순간들을 잔잔하면서도 재치 있게 그려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일상’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요리해서 시청자나 독자들에게 ‘호응’을 얻는다면 그 작가나 감독은 ‘반열’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연애시대’를 보는 동안 타임머신을 타고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착각 속에 빠질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아마도 다른 시청자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이셨을 겁니다.
마지막 회에서 라디오 ‘인생 상담 코너’를 맡고 있는 여주인공의 아버지가 자기 딸이 ‘괴로운 인생 상담’을 전화로 해오자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하십시오”라고 파격적인 어드바이스를 하는 장면은 압권이었습니다.
목사인 아버지는 아이를 사산하고 이혼한 자신의 딸에게 늘 ‘인내의 삶’을 해답으로 내놓곤 하던 ‘답답한’ 아버지였거든요. 그런 그가 딸의 ‘기구한 사랑’에 대해서 ‘사랑이 시키는 대로 하세요’라는, 이제까지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파격의 답안을 내놓은 것이죠.
결국 ‘사랑, 진실한 사랑만이 구원’이라는 인생의 ‘진리’앞에서 목사님은 ‘윤리’를 파괴하는 발언을 하지만 그건 어쩌면 ‘딸의 인간적 행복’을 바라는 순수한 부정(父情)의 발로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목사 아버지는 방송 중인데도 불구하고 딸의 이름을 부르면서 “니가 행복해져야만 이 세상도 행복해진다, 행복해져라” 라고 외칩니다. 굉장히 성경적인 대목이기도 하지요. ‘온 우주를 얻어도 내 자신이 없어지면 아무 소용없다’는성경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연애시대’는 워낙 ‘잔잔하면서도 좋은 대사’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대사의 힘’이란 것이야말로 드라마의 성패를 좌우하는 ‘최고의 요소’라는 게 제 개인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일상적이면서도 비일상적인 대사의 묘미, 거기서 우리 인생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그런 대사들. 아마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명작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도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촌철살인의 대사들 덕분 아닐까요? 그 ‘대사들’! 기막히지 않습니까. 전부 밑줄 그어가면서 읽어 내려가게 만들 정도로 가슴을 찌르지 않습니까.
사실 그동안 우리 TV드라마들을 가끔 보면 대사가 너무 시시해서 ‘작가의 소양’을 의심하고 싶은 그런 드라마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일상적인 것이 중요하다는 걸 어디서 듣긴 들었는지, 배우들에게 지루하고 권태로운 일상의 대사를 그대로 읊조리게 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연애시대’는 모처럼 그 촘촘한 대사의 ‘향연’이 마음에 들었던 수작(秀作)이었습니다.
마지막 회에서 여주인공의 나레이션도 촉촉한 봄비 같았죠.
“언젠가 변해버릴 사랑이라 해도 우리는 또 사랑을 한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처럼” “어떤 사랑은 시간과 함께 끝나고... 어떤 사랑은 시간이 지나도 드러나지 않는다.” “일상은 고요한 물과도 같이 지루하지만 작은 파문이라도 일라치면 우리는 일상을 그리워하며 그 변화에 허덕인다.” “언젠가는 변하고 언젠가는 끝날지라도 우리는 이 시간을 진심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독백’을 차분하게 하는 여배우의 음성도 오랜만에 듣기 좋은 목소리였습니다. ‘연애’에 꼭 어울리는 목소리? 라고나 할까요.^^
다른 여성과 이미 결혼해버린 전남편과 우여곡절 끝에 재결합해, 평화로운 잔디밭에서 남편과 함께 어린 딸의 재롱 속에서 ‘수를 놓고 있는’ 여주인공은 이런 ‘일상의 평온과 행복’에 대해서도 “그러나 여기가 내 시간의 끝이 아니기에 지금의 우리를 해피엔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라는 서늘한 대사를 남깁니다.
*사족으로, 이 ‘연애시대’의 원작자인 일본 남자 노자와 히사시(野澤尙)는 2004년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44세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답니다. 이렇게 좋은 작품을 만나게 해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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