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크라잉 넛'을 만나다

스카이뷰2 2006. 9. 25. 00:31
 

          크라잉 넛(Crying Nut)을 만나다



 

 

 

<동네 책방에서 구입한 ‘크라잉 넛’책과 CD음반> 사진위.

 

<애기 때부터 친구라는 한경록(왼쪽)과 이상혁>사진 아래 


 

어젯밤(23일)엔 아주 특별한 인터뷰를 했습니다. 예전에 어떤 유행가 제목에 ‘토요일은 밤이 좋아’라는 게 있었지요. 어제 저의 토요일이 바로 그랬습니다.


느닷없이 꽤 유명한 젊은 록밴드 그룹 ‘크라잉 넛’이라는 청년 아티스트들과 홍대 근처 뤼벡이라는 호프집에서 만나 예술과 인생에 대해 담소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었거든요.


개인적으로 예술을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걸 워낙 좋아하고 그들과 대중들과의 가교를 마련해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예술가들과의 만남’을 종종 가져왔습니다.

섬세한 예술혼을 지닌 예술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저의 영혼마저 맑아지는 그런 귀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지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동안 저는 ‘크라잉 넛’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그들은 홍대 근처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무명의 인디밴드들 중 하나였다가 지난 1998년 ‘말달리자’를 작사·작곡해 불러 크게 히트시키면서 일약 유명해졌다는군요.


현재 ‘말달리자’는  젊은 샐러리맨의 ‘영원한’ 애창곡 1위, 국민가요, 최고의 응원가· 20,30대의 노래방 애창곡 1위 등등 수많은 ‘영광의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전 무슨 유행가 가사에 ‘닥쳐, 닥쳐’가 후렴처럼 반복되는 것을 듣고 참 희한한 노래도 다 있구나라고 느꼈었는데 그게 바로 그 유명한 ‘말달리자’였습니다.  


사실 크라잉 넛과의 인터뷰는 토요일 오전까지는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이야기가 조금 복잡해지는데요, 우선 크라잉 넛과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차근차근 말씀드리고 싶군요.


며칠 전 차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우연히 ‘명동 콜링’이라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누가 부르는 건지 몰랐지만 제목도 특이했고, 흐느적거리는 레게 스타일로 시작하는 도입부의 멜로디가 아주 감각적이고 특이했습니다. 가사도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동승한 우리 가족도 그 노래가 좋다는데 흔쾌히 동감하더군요.


그 후 얼마 있다가 또 라디오에서 그 노래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크라잉 넛’이라는 그룹이 부른다는 멘트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집에 와서 인터넷에 들어가 ‘크라잉 넛’을 검색창에 치니까 그들에 대한 정보가 많이 나오더군요.


우선 곡이 하도 맘에 들어 ‘명동 콜링’을 듣고 또 들었습니다. 뭐랄까요, 이 노래는 그 리듬이 몸에 착착 감기는 듯 하는 아주 감각적인 느낌을 주는데다가 가사가 아주 멜랑콜리한 게 ‘슬픈 젊음’을 리얼하게 그린 것 같았습니다. 실연한 젊은 남자가 절규하는 듯 애절한 음색으로 부르는 것도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가사를 잠시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오 달링 떠나가나요 새벽별빛

   고운 흰 눈 위에 떨어져

   발자국만 남겨두고 떠나가나요


   크리스마스 저녁 명동거리

   수많은 연인들 누굴 약 올리나

   갑자기 추억들이 춤을 추네


   보고 싶다 예쁜 그대 돌아오라

   나의 궁전으로

   바람 불면 어디론가 떠나가는 나의 조각배야

   갑자기 추억들이 춤을 추네


   쇼 윈도우 비친 내 모습

   인간이 아냐 믿을 수 없어

   밤하늘 보름달만 바라보네

   

   생각해 보면 영화 같았지

   관객도 없고 극장도 없는

   언제나 우리들은 영화였지


‘새벽 별빛, 크리스마스 저녁 명동거리, 수많은 연인들, 언제나 우리들은 영화였지’ 이런 가사는 평범하면서도 ‘잃어버린 젊은 날들’을 반추하는 데는 아주 제 격인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이 노래는 ‘젊은 그들’보다도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누님’들이 좋아할 그런 분위기의 노래 같더군요.

  

내친 김에 ‘말달리자’도 들어봤습니다. 도입부의 ‘북소리’가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습니다.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라는 에세이도 떠오르더군요. ‘둥둥 둥둥’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북소리는 어떤 선동가보다도 사람을 격하게 만드는 효과음이었습니다. 가사는 또 얼마나 멋진지요. 지난 1998년에 ‘세상을 휩쓸었다’는 소리가 허언이 아닌 듯 했습니다.


뭐랄까요, ‘명동 콜링’과 ‘말달리자’를 들으면서 저는 20대로 돌아간 기분이었습니다. 이 두 노래에 빠져, 듣고 또 듣다가 갑자기 제 자신이 좀 어처구니가 없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게 뭐람! 이 나이에” 라는 생각의 한 켠으로 “좋은 건 좋은 것이다”라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습니다. ‘그냥 모처럼의 그 감성을 즐겨라’라는 속삭임도 들려왔습니다. 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감성이 녹스는 건 참을 수 없다’는 평소 저의 신조가 저에게 용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문득 이 곡들을 만들어 불렀다는 ‘가수’들과 ‘전화 인터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나면 바로 ‘실천 모드’로 돌입하는 저의 평소 스타일대로 저는 이곳저곳을 뒤져 크라잉 넛의 기획사 사장이라는 분과 통화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게 바로 어제(23일) 오전 11시쯤이었습니다.


크라잉 넛이 ‘아저씨’라고 부른다는 이석문 사장은 제가 ‘이차저차해서’ 그들과 통화를 하고 싶다고 하니까 그는 아주 들뜬 음성으로 “멤버 중에 한 명인 김인수가 지금 강남에서 결혼식을 올리니까 그리로 오시면 크라잉 넛의 공연도 보실 수 있다”고 하더군요.


마침 오전엔 스케줄이 있어서 오후라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는 흔쾌히 “오후 4시 이후에 홍대 정문 옆에 있는 뤼벡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그저 그들과 간략히 전화 인터뷰만을 하려 했다가 이렇게 일이 커지게(?) 된 겁니다. 마침 토요일이어서 우리 ‘스카이뷰의 블로그’ 독자여러분들에게도 좀 신선하고 재미있는 읽을거리를 대접해 드릴 수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엔돌핀이 마구 샘솟는 것 같았습니다.^^


어둑신한 실내에 들어서자 결혼피로연 뒤풀이 장소답게 젊은이들의 열기로 실내는 활기가 가득했습니다. 이석문 사장의 안내로 자리에 앉고 나서 조금 후에 ‘크라잉 넛’의 베이스를 맡고 있다는 한경록씨와 드럼을 친다는 이상혁씨가 다소곳한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76,77년생이라는데 얼핏 보면 한 대학 2,3년생들 같은 아주 앳된 모습들이었습니다. 다소 취기가 오른 듯 해보였지만 두 사람 모두 조금은 수줍어하는 기색을 보이는 예절바른 청년들이었습니다.


어리석게도 저는 그들에게 명함을 달라고 했다가 순간적으로 바보가 되었습니다. “그냥 노래 부르는 사람들이라서 그런 건 없어요”라고 말하더군요.

생맥주 3천cc와 마른안주가 나왔습니다.


수인사를 마치자마자 두 청년에게 저는 다짜고짜로 “‘명동 콜링’과 ‘말달리자’가 너무 맘에 들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한경록이 “‘명동 콜링’은 제가 노랫말도 쓰고 곡도 만들어 불렀어요”라고 말하더군요. 그러자 옆에 앉았던 이상혁은 ‘말달리자’의 작사 작곡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젊은 직장인들이 노래방에 가서 부르는 0순위 노래가 바로 말달리자라면서요”라고 말했더니 “제 노래 부르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에 대해 역사적 업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조금 취기가 오른 사람답게 거창한 답변이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전혀 ‘비호감’의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더군요. 두 청년 모두 요즘 유행하는 말로 ‘호감’이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작품’을 자랑스레 말하는 그들을 보면서 그 순간 저는 굉장히 반가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재능이 반짝이는 청년 아티스트들’과 그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 시공간이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질 수 없었습니다.


‘아주 특별하고 귀한 만남’의 자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보물같이 여겨지더군요.^^ 그러니까 ‘토요일은 밤이 좋아’가 제대로 들어맞은 해피 새터데이나이트였던 셈이죠. 요 몇 년 동안 이런 ‘성취감’을 맛본 주말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두 사람은 거의 친 형제같이 닮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둘이 꼭 닮았다고 했더니 이상혁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아기 때부터 친구라서요.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근 30년 가까이 같은 거 먹고 우르르 몰려다니고, 같이 군대갔다오고 했으니까요. 안 닮으면 이상하겠죠.”


어릴 때부터  한 동네 살면서 몰려다니던 이들은 애인도 없이 ‘명동거리’를 배회하기도 했고, 어느 정도 인기가 올랐던 무렵 ‘단체로 시험을 봐서 군악대에 입대’하는 호기도 함께 부린 ‘좋은 친구들’이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군악대’는 이 4인방 악동들을 받아들이고 엄청 시끄러웠을 것 같군요^^


“군악대는 군기가 엄청 쎄다고 하던데”라고 말하자마자 이 두 청년은 “겉군기만 센 거죠”라면서 유쾌하게 웃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군대도 편한 군대는 없습니다”라고 말하더군요. 


무슨 거창한 이론에 입각해 작품을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9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에 ‘크라잉 넛’이라는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는 점에서 그들은 ‘자부심’을 가질 만한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노래 만드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냐는 우문을 했더니 단박에 현답이 날아왔습니다. 이상혁은 ‘말달리자’를 여자 친구와 싸운 뒤 불과 5분! 만에 썼다고하더군요.


‘말달리자’는 IMF로 신음하던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한줄기 시원한 ‘기운’을 선사했다고 과언은 아닐 것 같습니다. 20대는 물론이고 30대 심지어는 40대들의 귀에도 이 ‘말달리자’는 파고들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론 ‘명동 콜링’이 실연을 하소연하는 ‘친구’같은 느낌이 들어서 어떻게 이런 곡을 만들게 되었는지를 물어봤습니다. “명동이란 공간은 설레는 느낌을 주는 공간이죠. 부모님들의 감정이 저에게 이입된 듯한 그런 공간입니다.”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크라잉 넛은 한 두 달 전쯤 제대 후 처음으로  이 ‘명동 콜링’이 실린 다섯 번째 음반을 발매했다고 합니다. CD표지에 웬 젖소 사진을 실은 이 음반은 그래도 1만장 이상이 팔렸는데 옛날로 치자면 10만장 정도 팔린 셈이어서 ‘안타’ 이상은 기록한 셈이라고 하더군요.


오늘 낮에 저도 이 음반을 하나 구입했습니다. 인터넷으로 ‘공짜’로 듣는 건 그 젊은 아티스트들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요.^^

음반에 실린 첫 곡은 ‘OK목장의 젖소’라는 특이한 제목이었습니다. 두 번째 곡 역시 룩셈부르크라는 독특한 제목의 노래였는데 이것도 모두 한경록이 노랫말을 붙였다고 합니다.


그의 가사를 유심히 본 사람은 알겠지만 노래마다 거의 ‘현대시’같은 쿨한 솜씨를 고루 보여주고 있어 ‘재능이 있는 아티스트’로서의 진면목을 과시하는 듯했습니다. 그런 ‘시적 재능’을 인정받아선지 그는 ‘음유시인’이라는 별명도 있다고 하더군요.


아직 ‘미소년’처럼 보이는 이상혁은 두 살 난 딸을 둔 애기아빠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모친의 권유로 대학에선 생명공학을 전공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자료를 보니 그의 쌍둥이 형 이상면도 ‘크라잉 넛’의 멤버로 역시 작사 작곡에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고 합니다.


쌍둥이 형제가 함께 록 밴드로 뛰고 있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겠지요. 그들의 모친은 아들들에게 “야 우리 때는 클리프 리처드가 왔을 때 브래지어를 던지는 열성팬도 있었는데 니네는 그런 팬은 없니?”라고 물을 정도로쌍둥이 아들들의 활동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친구들과 결혼 피로연 자리를 갖다가 ‘벼락 인터뷰’에 응해준 이들 젊은 아티스트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어 서둘러 인터뷰를 마치려하니까 한경록은 자신은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걸 아주 좋아한다고 말하더군요.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사려 깊은 청년들 같았습니다.


그들에게 좋아하는 선배 음악인들이 누구냐는 상투적인 질문을 던져봤습니다.  그들은 합창이라도 하듯 ‘비틀즈, 퀸, 섹스피스톨즈, 클래시,’ 등을 꼽았습니다.


그들의 ‘라이브 무대’를 직접 본 일은 없지만 함께 간 젊은 친구의 말에 의하면 그들의 공연은 ‘카리스마’가 넘치고 ‘피 끓는 청춘’이라는 말이 꼭 어울린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무대에서 막 날아다니고, 드럼 같은 건 거의 깨질 정도의 ‘파워’로 연주한다는 게 그 젊은 친구의 말이었습니다. 


요즘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 보면 젊은 남자가수들이 토크쇼 같은데 많이 나오던데 ‘크라잉 넛’은 잘 안 나오는 것 같더라는 말을 했더니 그들은 “우린 음악으로만 승부하고 싶어요. 말도 잘 못하구요”하면서 또 유쾌하게 웃었습니다.


이 젊은 아티스트들의 화법을 유심히 살펴보니까 그들에겐 어떤 ‘그늘’같은 것은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비교적 순탄하게 구김살 없이 살아온 청년들 같았습니다.


오늘 낮, 책방에 들러 ‘크라잉 넛’에 관한 책을 한 권 샀습니다. 4년 전에 발간된 것인데 용케도 동네 책방에 한 권 남아 있었습니다. ‘크라잉 넛’의 육성 대화록과 음악 평론가들, 소설가, 사회비평가 등이 그들을 다각도에서 분석해놓은 책이었습니다.


그들의 대화록을 보니 역시 ‘구김살 없는 발랄한 화법’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한 음악평론가는 ‘크라잉 넛’이 1990년대 대중가요사에 ‘빠질 수 없는 존재’들이라고 평했습니다.


그는 “‘크라잉 넛’의 성공은 절충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하면서 그들이 펑크음악으로 시작했지만 거기에 함몰되지 않고 음악적 ‘자유’를 발견하고 펑크를 넘어 레게와 스카 뿐 아니라 폴카와 보사노바도 할 수 있었다는 것에 그 힘의 원천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니까 ‘크라잉 넛’은 ‘여러 장르를 아우르는 한국의 펑크’를 만드는데 성공했기에 대중적 성공도 거둘 수 있었다는 얘기겠지요. ‘크라잉 넛’의 절충주의는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대중들이 절로 좋아하는 음악의 본연으로 이끌었다는 평가입니다.


그들이 ‘비주류 출신’이기에 가장 요청되는 것은 ‘판’을 꾸릴 수 있는 ‘경제학’이었는데 이 점에 그들이 ‘제대로’ 적응했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크라잉 넛’의 ‘음악세계’가 대중적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재능을 갖추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지요.


그 평론가의 말은 ‘크라잉 넛’이 “음악으로 말했고, 시대를 말했다. 음악성과 시대성이 사이좋게 동거한다. 90년대 음악을 개괄할 때 이제 그들을 서태지나 이수만 사장 옆에 세워도 아무런 문제나 어색함은 없다”는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저는 이 젊은 아티스트들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지만 굉장히 ‘대단한’ 록밴드였나 봅니다.


비록 짧은 시간의 만남이었지만 저는 이 젊은 아티스트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유명한 연예인’치고는 굉장히 겸손한 젊은이라는 점을 높이 사고 싶었습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유명 연예인’들은 만나보면 같이 대화하기가 힘들 정도로  ‘교만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크라잉 넛은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아 ‘안심’이 되더군요.


아마도 그들이 감미로우면서도 조금은 애환이 서린 쌉쓰름한 가사들을 쓸 수 있다는 것도 그들이 삶에 대해 겸손하면서도 진지한 자세를 잃지 않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삶의 ‘진정성’을 어느 정도 아는 친구들이라고 봐도 괜찮겠지요.


그들과의 ‘행복한 토요 데이트’는 제게 큰 활력소를 선사했습니다. 그들의 CD음반을 구입한 것도 그들이 저에게 선사한 활력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고나 할까요. 앞으로 ‘크라잉 넛’은 40대 50대가 되어서도 ‘신선한 감각’을 잃지 않는 ‘서정적이면서도 번개 같은’ 음악을 우리들에게 선사할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크라잉 넛!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