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노벨문학상작가 오에 겐자부로와의 만남

스카이뷰2 2006. 5. 22. 07:25
 

        노벨문학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와의 만남


 

 

        <좌담회장 입구에 붙어있는 포스터입니다>


 

  <대담이 시작되기 전, 이런 문화적 시공간이 사람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오에 겐자부로씨의 기조연설을 경청하고 있는 김우창 교수>



 

 

  <사인을 해주기 위해 필통에서 필기구를 꺼내고 있습니다.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같죠?>



 

 

 <독자가 가져온 자신의 번역본에 만년필로 사인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작    가의 성실함이 느껴집니다.>



 

  <저도 手帖에 사인을 받았습니다.^^ 특이하게도 자신의 서명 옆에

  작가는 도장을 찍었습니다.   난생 처음 작가로부터 받은 사인입니다.

  우리 블로그 독자들을 위해 용기를 내서 받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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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일 저는 꽤 근사한 ‘문화적 체험’을 했습니다. 모두 우리 블로그

독자여러분 덕택입니다. 여러분이 밀어주시는 그 ‘힘’으로 강연회장까지 용감하게 뛰어갔거든요.^^


19일자 조간신문에는 지난 94년 노벨상문학상을 받은 일본의 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씨가 18일 고려대학에서 강연회를 가졌다는 소식과 함께 19일 오후 서울 교보빌딩에서 공개 좌담회를 갖는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고나 할까요, 그렇잖아도 우리 SKYVIEW 블로그의 ‘토요 스페셜’로 무얼 서비스할까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언제나 토요일엔 좀 재미있고 유익한 얘기를 독자여러분께 한상 가득 차려올리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실천에 옮기기가 쉽지 않아 은근히 고민을 많이 해왔습니다.


그러니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일본작가와 한국의 대표적 지식인의 한 사람인 고려대 김우창 교수의 공개 대담 소식은 거의 ‘가뭄에 단비’ 수준이었죠.

더구나 두 사람 모두 제겐 ‘좋은 이미지의 남자들’에 속하는 분들이니 아예 신바람이 났습니다.


‘독자 서비스’차원에서 거금을 주고 며칠 전 장만한 ‘디지털 카메라’를 갖고 ‘마음도 가볍게’ 광화문 교보빌딩으로 향한 겁니다. 솜씨는 없지만 그래도 제 손으로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리는 일은 처음이어서 조금 떨리는 마음도 있었죠. 위에 올린 사진들이 바로 저의 ‘첫 작품’이랍니다.^^


행사장에 30분 쯤 전에 도착했는데도 꽤 많은 청중들이 자리하고 있더군요. 그만큼 ‘노벨상 작가’에 대한 관심들이 높다는 얘기겠죠. 사진을 찍기 위해서라도 맨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오후 3시 정각에 오에 겐자부로 씨와 김우창 교수가 연단 앞으로 등장했습니다. 언론사에서 온 듯한 덩치 큰 카메라맨들이 ‘성능 좋아 보이는 카메라’로 사진 찍는 모습을 보니까 손바닥만한 저의 디지털 카메라가 갑자기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기죽지 않고 저도 셔터를 눌렀답니다.^^


사회자가 두 연사의 약력을 소개하고 있는데 오에 씨는 다소 근심어린 표정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조금 후에 밝혀졌지만 주최 측의 ‘잠깐 실수’로 그에게 ‘통역기’가 지급되지 않아 오에 씨는 속으로 크게 걱정을 했노라고 말하더군요. 물론 부랴부랴 통역기가 작가의 귀에 부착되고 난 뒤의 얘깁니다.


‘성실한 모범생’타입의 오에 씨는 1935년 생으로 우리 나이로 일흔 두 살의 할아버지였지만 대담이 진행되면서 고이즈미를 비롯한 일본 정치인들을 예리하게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작가 정신’ 이랄까, 굽히지 않는 지식인 정신을 지닌 그의 모습에서 ‘나라의 선생님’같은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그런 그도 일본 내에서는 “오에는 대중문화, 서브 컬처를 무시하고 자기만 잘난 체 하지 않나”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작가스스로가 밝히더군요.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습니다.


통역기를 받고 ‘활기를 되찾은’ 작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 체험을 털어놓으면서 청중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일본의 시코쿠라는 ‘산골마을 출신’으로 10세 때 종전(終戰)을 맞았다고 합니다. 우리에겐 ‘해방’이었죠. 마을에 미군들이 지프를 타고 나타났는데 통역을 데리고 올 예정이었다가 너무 작은 마을이어서 통역이 없었다는 겁니다.


오에 씨의 집안은 ‘나무를 심고 재배하고 자라게 해 종이를 만드는 일’을 가업으로 하고 있었답니다. 작가의 부친은 영어로 된 식물도감을 갖고 있었고, 오에 소년은 영어와 라틴어가 병기된 이 책을 보면서 열심히 나무이름을 외면서 자신도 자라서 집안일을 이어받아 생계를 꾸려나갈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고 합니다.


통역이 없어 당황하던 동네 어른들 중 한 사람이 “오에가 라틴어도 영어도 할 수 있다더라, 걔한테 물어보면 통역이 가능할 것이다”라는 말을 해 졸지에 오에 소년은 ‘꼬마 통역사’로 어른 들 앞에 불려 나왔다는군요. 아마도 굉장히 총명한 어린이였나 봅니다.^^

물론 ‘통역’은 불가능했지만 미군병사들이 망원경을 갖고 나무들을 가리키면서 ‘나무이름’을 물어보면 ‘꼬마 통역사’는 영어와 라틴어로 대답을 해줬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한 60여 년 전 일본의 한 시골마을로 달려가 보면 아주 재미있는 풍경을 볼 수 있을 것 같군요.


열 살짜리 꼬마아이가 평소 익혔던 ‘외국어 솜씨’로 미군들 앞에서 나무이름을 영어로 종알거리는 광경을 상상해 보세요. 너무 귀엽지 않나요?


‘꼬마 통역사’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고, 미군은 소년에게 럭키스트라이크 담배 한 타스를 ‘통역비’로 지급했답니다.

소년은 이걸 자랑스레 엄마에게 드렸고, 엄마는 그걸 암시장에 내다팔아서 소년의 학생복을 사주셨다고 합니다. ‘종전’이후 어려웠던 일본의 생활상을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죠.


노작가는 60여 년 전 자신의 소년시절 이야기로 부드럽게 대담을 시작했습니다. 장내의 청중들 역시 즐겁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노작가는 곧 이어 ‘기조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제 노년에 접어들어, 앞으로 얼마나 더 문학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지 불안하지만, 지금 자주 생각하는 것은 1910년 한국 합병조약으로부터 100년이 되는 것이 2010년, 일본인이 이러한 100년의 역사를 제대로 재인식해서 다음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시민들과 자주 대화하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강연과 함께 노작가는 현 일본 총리인 고이즈미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고이즈미가 한국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해 올바른 역사인식을 보이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역사를 인식한다는 것은 과거에 대해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전망을 포함해서 지금 현재를 바르게 응시하고, 책임 있는 행동을 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고이즈미는 책임 있는 행동을 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겠지요.


작가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편협한 민족주의를 극복해 나가지 않으면 동아시아의 미래는 없다면서 각국의 ‘시민의 소리’가 합쳐져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나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국가권력을 뛰어넘어 ‘시민들끼리의 연대’를 통해 어떤 새로운 ‘힘’을 창출해 평화와 질서를 유지해 나갈 수 있다는 게 자신의 ‘생각’이자 ‘꿈’이라고 말했습니다. 국가는 대립해도 인터넷 시대에 시민들끼리의 ‘소통’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인생의 지혜로 가장 중요한 덕목을 ‘모럴’로 꼽았고, 프루덴셜(prudential)한 방향으로 동아시아 시민들이 함께 나갈 것을 제안했습니다.


프루덴셜의 뜻에 대해 그는 “영어 사전에 보면 나와 타인을 위해 미래의 어려운 일에 부딪히지 않게 행동한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함께 살아가면서 내 자신과 이웃이 피해 받지 않도록 하는 거” 라고 덧붙였습니다. 영한사전에는 신중한, 조심성 있는, 세심한, 분별력 있는, 등의 뜻으로 나오더군요.


김우창 교수 역시 기조강연을 했습니다. 문학과 정치가 사회에 기여하는 ‘힘’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정치는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강한 힘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흔히 보는 현상은 인간의 모든 것이 정치에 종속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문학인이 발견하는 삶의 고유하고 진정한 모습- 개인으로서, 집단의 일원으로서,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모습은 그 나라의 정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국제적 정치에도 해당되는 것일 겁니다.

나라와 나라들이 보다 사람의 모든 것을 서로 인정하는 이웃이 되게 하는 데에 문학이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김 교수는 오에 씨가 제시한 ‘시민 아이덴티티’에 대해 “시민들이 횡적 연대를 통한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면서 “더불어 살아나가는 공동체 성립”의 중요성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는 ‘독도문제’에 대해 “일본이 도덕적 반성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야스쿠니 문제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고 따끔하게 일본 정치인들의 행태를 비판했습니다. “일본인이 개인적으로는 정직 성실하나 국가적으로까지 확대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덧붙여 말했습니다.


김 교수 역시 “민간차원의  교섭이 매우 중요하다. 자기 정부를 도덕적으로 행동하라고 비판한다고 하루아침에 도덕적 공동체가 되는 건 아니지만 이웃 국가와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그것이 나 자신을 위하는 일이라고 자각하고 그것을 확대해 나가는데 는 문학인이나 지식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독도문제에 대해 오에 겐자부로 씨 역시 상당히 조심스러우면서도 작가 특유의 비판 정신을 잃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는 “독도 혹은 다케시마에 대해 한국인들이 들으면  화날 일일지도 모르지만 일본인들은 독도가 영토차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면서 고이즈미를 비롯한 일본의 소수 정치인들이 대다수 국민들을 선동하고 나라를 이끌어가는 수단으로 ‘민족주의’ 적인 관점에서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두 분 모두 워낙 점잖은 지식인들이어선지 그 자리에선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직설화법’은 쓰지 않더군요.^^


오에 씨는 ‘민족주의’를 지하수같이 흘러가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이를 분출시키려는 정치인들의 선동은 결코 도움이 안 된다고 계속 고이즈미를 겨냥한 비판 발언을 했습니다.


얘기가 너무 딱딱하게 흘러온 것 같군요.^^ 아무튼 이 두 사람의 지식인이 주장하는 요점은 ‘국가권력이 정치인용(用)이고 정권유지 차원에서 민족주의를 써먹기도 하지만 21세기 사회에서의 주체는 시민그룹이어야 하고 인터넷 등을 이용해, 시민들끼리 소통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거였습니다.


물론 오에 씨는 여기에 ‘프루덴셜 정신’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구요, 김 교수는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정신’을 말했습니다. 결국 두 지식인의 지향점은 같은 곳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정치인들이 각성해야 할 텐데 그들은 또 그들의 논리로 ‘생존해 가는 수밖에 없는 운명’이고 보니 합일을 보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된 대담 도중 ‘무라카미 하루키’이야기도 나왔습니다.

노작가는 후배 작가이기도 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한국에서도 자신의 책보다 한 100배쯤 더 팔린다는 사실에 놀랐고 또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작가는 김 교수가 기조 발언 도중 “오에 선생의 작품을 그리 많이 읽어보지 않았다”고 말한 것에 은근히 신경이 쓰였는지, “여기 김 교수도 제 작품을 별로 안 읽었다고 하셨듯이”라는 말을 해 청중들의 웃음을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이에 김 교수는 자신이 “일본 교토에 머물던 시절 오에 선생이 노벨상을 타서 책방에 선생의 작품집을 사러갔는데 한 종류 밖에 없어서 그런 얘기를 한 것”이라고 ‘상황설명’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오에 씨의 소설이 ‘하이 컬처’에 속한다는 규정을 했습니다. 


노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한국의 중년 남성들도 많이 읽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작품세계가 ‘인간자체’의 연애라든가 성애 혹은 여러 가지 ‘인생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어필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대담이 거의 끝날 무렵, 시간관계상 청중의 질문을 한 가지만 서면으로 받아서 사회자가 오에 씨에게 대신 물었습니다.

“왜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느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좀 생뚱맞죠? 나이 칠순이 넘은 노작가에게 대학전공에 대해 묻는다는 게. 아마도 질문자가 젊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노작가의 대답이 히트였습니다. “어머니가 굉장히 엄하게 교육하셨다. 어머니가 외국어 중 가장 어려운 것을 하라고 하셔서 동경대 불문학과에 가게 된 것이다”라는 말에 청중 속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어린 시절 작가는 아마도 ‘마마보이’였나 봅니다.^^


작가는 자신의 인생에서 불행한 일 두 가지는 “아시아의 외국어를 공부하지 않았다는 것과 귀가 너무 크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다시 태어날 기회가 있다면 중국어나 한국어를 비롯한 ‘아시아의 외국어’를 공부하고 싶다면서 요새 ‘읽기’는 조금씩 공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상당히 학구적인 할아버지인 것 같죠?^^


그런데 귀가 커서 불행하다고 느낀다는 것에 대해선 그 ‘이유’를 묻지 못했습니다. 글쎄요?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꼭 한번 물어보고 싶은 대목입니다.

그밖에도 그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그의 ‘장애인 장남’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 지, 다음 작품은 어떤 걸 준비 중이시냐는 둥, 궁금하고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지만 ‘시간이 없어서’ 묻지 못한 게 좀 아쉽더군요.


좌담회를 마치고 전혀 예상을 못했었는데 사회자가 ‘팬 사인회’를 갖는다고 하더군요. 수 십 명의 젊은 청중들이 각자 집에서 가져온 듯한 오에 씨의 번역본 혹은 원본 작품집들을 들고 순식간에 줄을 서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연단 위, 노작가의 테이블에 바싹 다가가서 저의 명함을 꺼내들고 “선생님 명함  있으십니까”라고 일어로 물었습니다. 노작가는 순간 너무도 당황한 모습으로 “아 저는 명함이 없는데요.”라고 말하더군요.


그 표정이 어찌나 성실하고 착해 보이는 지 이쪽이 오히려 미안할 지경이었습니다. 그의 명함이 뭐 필요하겠습니까마는 블로그 독자들을 위해 혹시 ‘노벨상 수상 작가는 어떤 명함을  갖고 다니는지’ 호기심 차원에서 물었던 겁니다. 그는 제가 드린 명함을 자신의 양복상의 주머니에 아주 조심스럽게 넣더군요. 거의 엄숙한 표정으로요. 그만큼 상대방을 ‘배려하는’ 그의 ‘프루덴셜 정신’의 발로겠죠.^^


사인을 받는 청중들은 대부분이 학생 스타일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저는 계속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한 여학생이 ‘애매한 일본인’이라는 작가의 일본어 수필집을 들고 사인을 요청하자 그는 “일본인입니까”라고 묻더군요. “한국인”이라는 답을 듣자 그는 “曖昧한”을 한국어로 어떻게 발음하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작가는 청중들과 조금이라도 ‘교감’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제까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유명인사의 ‘사인’이라는 걸 받아본 일이 없는 저도 드디어 저의 조그만 수첩을 작가 앞에 내놓고 ‘사인’을 부탁해봤습니다. 그게 바로 위의 사진입니다. 작가는 만년필로 자신의 大江健三郞 이라는 이름을 한자로 쓰고 그 아래 도장을 꾹 눌렀습니다. 물론 조그만 ‘인주통’도 가져왔더군요. 참 특이하죠? 뭐랄까 작가의 ‘완벽주의’같은 걸 느껴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고나 할까요.


이렇게 해서 두 시간 가량의 좌담회는 아주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끝났습니다.


옥의 티라면 YS때 문교부 장관을 지냈던 김숙희 씨가 청중 속에 앉아 있다가 대담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종료시간 30분 전쯤  두 분 앞을 지나쳐 나가는 것을 꼽을 수 있겠네요.


물론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일국의 장관 정도 지내셨던 분이라면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게 더 낫지 않았겠느냐가 제 개인 생각입니다. 그분이 나가고 조금 있다가 제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제법 유명한 남자 ‘환경운동가’도 쏘옥 나갔습니다. 


이 남자는 좌담회가 시작하기 전에 김숙희씨를 보더니 ‘오똑이’처럼 일어나 인사를 아주 정중하게 해 저를 웃게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뭐 인사하는 건 나쁘진 않죠. 하지만 왠지 그의 인사하는 모습에서 ‘순수함’이 느껴지지 않았다고나 할까요.


별걸 다 신경 쓴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전 그들이 그렇게 좌담이 끝나기도 전에 강연회장을 나가버린 것이 영 찜찜하더라구요. 그래도 사회적으로 이름 깨나 알리고 산다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는 건 ‘사회적으로 유익한 일’은 아니라는 게 저의 ‘보수적인’ 생각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강연이 끝나고 오랜만에 빌딩의 지하에 있는 교보문고에 내려와 ‘책구경’을 하는데 왜 그 ‘뿌듯한 심정’있죠, 무언가 문화적으로 포식해 기분이 좋은 ‘그런 포만감’이 들어 간만에 ‘해피한 마음’이었답니다.^^


횡설수설한 졸문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