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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38>지적(知的) 경호원이 필요했던 아인슈타인

스카이뷰2 2009. 5. 14. 11:12

 

 

 지적(知的) 경호원이 필요했던 아인슈타인

 

결혼 후 밀레바는 아인슈타인이 회장인 올림피아 아카데미의 준회원이 되었다. 장소를 제공하는 안주인인데다, 밀레바 본인도 물리학을 전공했기에 아카데미 모임의 회원들의 열띤 토론 모습은 그녀를 행복하게 해줬다.

 

정회원 3명에 1명의 준회원으로 구성된 초미니 규모의 학회였지만 아인슈타인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최초의 모임이어서 그는 어딜 가서도 아카데미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부부는 현악4중주단을 초청해 작은 클래식 음악회도 열었다. 

 

그녀는 토론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았지만 간식을 마련해주고, 거칠고 야한 농담을 즐기는 신랑 아인슈타인에게 브레이크를 거는 역할을 했다.

토론이 끝난 후 밀레바가 뒤치다꺼리를 하는 사이에 아카데미 멤버들은 여유작작한 기분으로 불 꺼진 아케이드 거리를 지나 아레 강변까지 심야 산책을 즐겼다.

 

혈기방장한 멤버들은 산책도중에도 철학 물리학 이론들과 도스토옙스키 모차르트 베토벤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100년 전, 이  신진 물리학자 부부의 일상은 지금 봐도 상당히 낭만적이고 지적인 수준이 꽤 높은 삶이었던 것 같다.

 

아인슈타인이 그랬듯이 올림피아 아카데미의 수석 회원 격인 졸로비네나 하비히트 등도 아카데미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다. 졸로비네는 아인슈타인에 대해 ‘영혼이 가난한 자들의 예배를 집전하는 최고의 사제. 우주에 대한 혁명적인 과학에 파묻힌, 자연에 대한 지식이 충만한 자’등으로 극찬했다.

 

아인슈타인은 언제나 물리학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로 혼란스러워진 자신을 위로해줄 수 있는 ‘응원군’에 목말라했다. 아마 김나지움 시절 뛰어난 수학성적을 받고 어머니로부터 칭찬받곤 하던 그 유년시절이 그의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요즘 떠도는 말 중“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것처럼 ‘칭찬받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가 아인슈타인에겐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박사학위 논문도 없고, 대학 강단에 서지도 않았고, 어떤 권위 있는 학자의 지지를 받는 입장도 아니었다. 그래서 늘 자신이 일하고 있는 특허국에 마음 맞는 수학자와 물리학자들을 끌어들여 모임을 만들고 싶어 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스터디그룹’을 운영하면서 서로의 아이디어와 정보를 교환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을 학문적으로 지지해줄 ‘지적(知的) 경호원’들을 아인슈타인은 절실히 원했다는 말이다.

 

그는 막역한 친구였던 베소를 특허국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베소는 그의 추천으로 아인슈타인보다 한 단계 높은 2급 사무원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아인슈타인은 특허국에서 영구직에 임명되었고 연봉도 올랐다. 하지만 베소보다는 적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한 직장 안에 물리학에 대해 심도  있는 토론을 할 수 있는 벗이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로 만족했다.

 

그의 생애를 따라다니다 보면 아인슈타인은 물질적인 욕심은 별로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활도 굉장히 검박한 편이었다. 아니 그런 표피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신경을  거의 쓰지 않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에게는 물리학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를 둘러싼 인간적인 관계  특히 가족이라는 이름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서도 그는 그냥 심드렁하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말하자면 물리학이외의 어떤 것이든 모두 그의 물리학 이론의 제단에 바쳐진 제물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