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연재 39>카페를 사랑한 아인슈타인의 혁명

스카이뷰2 2009. 5. 18. 11:17

 

 

   카페를 사랑한 아인슈타인이 일으킨 혁명 

 

거의 모든 사람은 스스로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쳐지는지에 대해선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쩌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속성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누구인지 객관적으로 증명해낼 수 있는가! 특히 아인슈타인 같은 ‘세기의 천재’는 자신을 부담스러워하는 주변에 대해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 법이다. 아인슈타인은 명성을 얻은 후  세간에 날아다니는 자신에 대한 ‘괴담’들에 대해 친구에게 이렇게 하소연했다.

 

“나에 대한 파렴치한 거짓말들과 완전한 허구들이 이미 몇 상자나 출판 되었다. 만약 내가 그것들에 조금이라도 신경을 썼다면 그 순간 나는 차라리 죽어서 무덤 속에 들어가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에게 죽음이 다가올 무렵인 1954년 오랫동안 우정을 나눠왔던 벨기에의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가 자신에 대한 세간의 ‘유언비어’에 그렇게 자유롭지는 않았었던 걸 짐작할 수 있다.

 

“나의 인격에 대하여 온갖 이야기들이 돌아다니고 있으며 교묘하게 꾸며낸 거짓말들이 끊임없이 쏟아져왔습니다. 이 때문에 나는 진정으로 솔직한 것을 존경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재물에는 거의 관심을 갖지는 않은 듯했다. 그렇기에 자기보다 6세 연상이지만 친구로 지내고 있는 베소를 앞뒤 계산하지 않고 특허국으로 오게 한 것이다. 그냥 세속적인 보통사람이었다면 그는 ‘승진’을 염려해 라이벌이 될 자리에 친구를 추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학창시절부터 카페를 좋아했던 아인슈타인은 직장인이 되어서도 카페를 거의 매일 들락거렸다. 그의 막강 원군인 올림피아 아카데미의 회원들이나 베소와 함께 단골인 카페 볼베르크에서 저녁 늦도록 침을 튀기며 물리학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술을 마시지 않는 그는 카페에 앉아 독한 시가를 줄기차게 피워대는 바람에 젊은 나이였는데도 갈색으로 변한 치아에 탁성으로 거친 목소리였다. 

 

첫아들을 본 신혼 시절 아인슈타인은 일요일이면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시내를 한 바퀴 돌곤 했다. 그때도 그는 파이프를 입에 물고 한 손엔 물리학 이론 메모 수첩을 잊지 않았다. 그 옆엔 어느새 뚱뚱하고 거친 피부로 변한 서른 살의 밀레바가 절름거리며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생애 최고로 행복한 나날이었을 것이다. 비록 물리학 이론엔 아인슈타인 혼자 매달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때때로 자신의 지혜를 조언해주는 것으로 만족해했다.

하지만 그녀 가슴속에 내재되어있던 학문에의 열정은 폴란드 출신 여성과학자 퀴리 부인이 그녀의 남편과 공동연구로 노벨 화학상을 타내는 것을 보자 질투심과 부러움으로 다시 불붙어 올랐다.

 

그렇다고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연구에  자신을 동참시켜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현실이 그녀를 우울 속으로 몰아갔다. 그녀가 우울하면 아인슈타인도 편치 않게 마련이었다. 이제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혼집의 분위기는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이 더 많아졌다.

 

인류역사상 1905년은 매우 중요한 ‘혁명의 해’로 일컬어진다. 스위스 특허국 소속 기술 전문직 기사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네 편의 논문들이 인류 과학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물리학계의 지평을 새롭게 펼친 공로로 그는 물리학계의 코페르니쿠스라는 별칭도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