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소년 축구경기 시합전. 선수들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다음 카페사진.)
11세짜리 대한축구협회 등록선수와 그 친구 이야기
엊그제 저녁 무렵, 우리 집 바로 뒤에 있는 오마공원에서 축구 선수 유니폼을 입고 있는 꼬마 축구선수와 우연히 만났다. 소년은 월드컵 국대팀 김치우선수와 꽤 비슷하게 생겼다. 그래선지 괜히 더 반가운 마음이 들어 그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몇 학년이지”
“ 5학년이요”
“그럼 너 기랑이 알아?” 기랑이는 우리 집 위층에 사는데 인사를 하도 잘해 나와 친해진 예절바른 아이다.
“네 잘 알아요.”
“기랑이도 너랑 같은 축구부니?”
“아니요, 저는 대한축구협회 공식 등록선수구요, 기랑이는 그냥 취미로 하는 축구교실에 다닐걸요.”
‘대한축구협회 공식 등록선수’라는 말을 할 때 소년은 프라이드에 넘쳐 보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소년의 얼굴은 아주 환하게 빛났다. 소년의 그런 자신감은 처음 본 나까지 덩달아 기운 나게 해줄 정도로 자랑스러움에 넘쳤다.
어린 아이들의 그런 맹목의 자신감은 어른들에게 종종 힘이 되는 것 같다.
소년은 자신이 비록 초등생이지만 대한축구협회라는 ‘대단한 국가공식 기구’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럼 포지션은 뭐야?” “미들 필더에요.”
“공격수야?” “네!” “어떤 선수를 좋아하니?”
“박지성 형이랑 박주영 기성용 형이요.”
소년은 평상복 차림으로 옆에 있던 친구와 함께 ‘사우디 팀과의 경기’를 보러간다면서 내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부리나케 집 쪽으로 뛰어갔다.
마침 그날 저녁엔 우리나라와 사우디의 월드컵 예선 경기가 있어서 내 마음은 행복한 ‘축구적인 정서’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축구적인 정서’란 말은 그냥 내가 한번 만들어 본 말이다. 기분이 슬럼프에 빠졌을 때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몇 가지 ‘비방’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꽃미남 기성용의 멋진 발리슛이나 박지성의 묘기 슛이 골로 이어지는 장면을 떠올리다 보면 어느새 기운이 돌아온다. 그런 상태를 ‘축구적인 정서’라고 일컬어 본 것이다.
바로 요 며칠 전 우리 국대 팀이 7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룩한 것은 우리나라 국민의 정서 안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나라가 이런저런 일들로 한창 시끄러웠지만 국대 팀의 ‘축구수혜’를 누린 나 역시 며칠 동안 기분이 업된 상태였다. 세상에 별 부러울 게 없다는 이런 정서적 충족감은 돈 주고 사기 어려운 것이다.
아마 여러 사람이 이런 무상의 행복감을 음미하면서 ‘서울 상암 경기장’에서 열리는 사우디와의 시합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역대 전적 ‘4승 5무 6패’로 우리보다 한 수 위인 사우디였지만 우리는 이미 본선 행 티켓을 확보해 놓은 상태기에 아무 스트레스 없이 거의 ‘덤’으로 즐길 수 있다는 느긋함이 웬만한 축구 팬들의 마음을 그토록 평화롭게 해주었을 것이다.
‘항산항심(恒産恒心)’이라는 말도 있듯이 이렇게 뭘 좀 ‘확보’해 놓은 상태면 마음이 느긋해져 주위를 살펴보는 여유가 생기는 법이다. 그 날 공원 산책이 그랬다. 행복한 ‘축구적인 정서’에 휩싸이다보니 축구선수 유니폼을 입은 ‘꼬마 선수’가 그렇게도 대견스러울 수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국가 공식 등록선수’라며 무한한 자부심에 차 있는 소년의 아름다운 표정은 내게 ‘또 하나의 행복’을 선사해주었다.
그날 사우디와의 경기는 다 알다시피 비록 0대0으로 비겼지만 우리 국대 팀 선수들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그라운드를 펄펄 날아다니면서 우리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해주었다. 득점으로 이어지는 골결정력이 약한 게 다소 아쉬웠지만.
그 이튿날, 그러니까 어제 저녁 나는 기랑이를 우리 집으로 불러 그 ‘대한축구협회 공식 등록선수’에 대해 물었다.
“너 혹시 이 동네 사는 오마 축구부 5학년 선수 알아? 걔는 널 안다는데”
“혹시 키 좀 작고 얼굴 까맣고 뚱뚱하지 않아요?”
“응 맞아”
“아 걔요, 장혁이라구 축구부 선수 맞아요.”
“기랑이는 축구부 아니야?”
“네, 전 옛날에 잠시 축구부 하다가 얼굴을 다쳐서 상처가 1주일도 더 갔거든요. 그랬더니 우리 할아버지께서 축구고 야구고 절대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냥 안하고 있어요.”
“오마 축구부는 잘 하고 있니?”
“아니요, 요새 오마 축구부가 영 부진해요, 잘하던 6학년 형들이 졸업하고 나선 시합에 나가면 주로 지고 돌아와요.”
“기랑이는 축구가 하고 싶어 야구가 하고 싶어?”
“저는 야구선수가 되면 좋겠는데요...또 얼굴을 다쳐서요.... 어려울 것 같아요.”
바로 며칠 전 야구를 하다 입 언저리에 부상을 당해 요즘 매일 병원에 다닌다고 했다. 나와 말하는 동안에도 입 주위에 손가락 두 개 크기의 반창고를 붙인 상태였다.
기랑이는 장혁이라는 친구가 ‘대한축구협회 공식 등록선수’라는 사실엔 별 흥미가 없다는 듯 “축구협회 그런 건 잘 모르겠고요, 저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에 관심 많아요.”
이런 말을 하면서 기랑이는 맨유 선수들의 이름을 줄줄이 꿰었다. 그런 기랑이도 장혁과 마찬가지로 국대 팀 선수로는 박지성 형과 박주영 형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다.
‘대한축구협회 공식 등록선수’인 장혁이나 축구교실 멤버인 기랑이나 모두들 축구에 대해선 해박한 지식을 가진 ‘꼬마 축구박사’들이다. 이런 소년들이 바로 대한민국 축구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일 것이다.
문득 우루과이의 언론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가 자신의 축구에세이집 서문에 남겼던 서문이 떠올랐다.
"이 글을 수 년전 길에서 나와 마주쳤던 적이있는 꼬마 선수들에게 바친다. 그들은 축구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고,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었다. "
'우리는 이겼다. 우리는 졌다. 그러나 우리 모두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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