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레싱 할머니.(다음 자료 사진)
91세 현역 블로거 ! 도리스 레싱 작가
일면식도 없지만 나에게 기운을 주는 여성문인들이 몇 있다. 그들 중 2007년 89세! 때 노벨문학상을 받은 영국 작가 도리스 레싱 할머니를 맨 먼저 꼽고 싶다.
영국인이지만 이란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그곳에서 보낸 탓인지 ‘이란 할머니’ 분위기가 서려있어 보이는 이 할머니작가는 지금 무려 91세의 ‘노익장(老益壯)’으로 여전히 형형한 눈빛으로 이 세상을 쏘아보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최고령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는 당당함과 더불어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이 레싱 할머니는 ‘멋진 블로그’를 운영 중이라는 점이다. 대단하지않은가! 망백의 나이에 ‘디지털 보헤미안’대열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
60년 가까이 문학활동을 해오면서 세계적 대문호 반열에 올라있는 이 할머니의 블로그(www.myspace.com/dorislessing)를 방문한 것은 내게 아주 유쾌하고 즐거우면서도 장엄한 기분을 선사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이라는 문학적 성취를 떠나서 한 인간의 존엄함을 느낄 수 있었고, 산다는 것에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해주었다.
나야 ‘별 볼일 없는’ 무명의 블로거에 불과하지만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한 레싱 할머니가 ‘현역 블로거’라는 사실은 반갑고 든든하다.
이 할머니작가의 블로그는 마음이 외로워질 때 언제라도 달려가 하소연할 수 있는 믿음직한 버팀목 같다. 마치 동네어귀에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같아 보인다. 멋지다.
그렇잖아도 ‘블로그한다는 것’에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던 차에 91세 대문호 할머니가 운영하는 블로그를 돌아보고 나니 이렇게 정신이 번쩍 든다.
그야말로 캠퍼주사 맞은 것보다 더 강력한 약발을 얻은 것 같다.
아마도 블로그를 운영하는 전세계 블로거들에게 노벨상까지 받은 이 도리스 레싱 할머니의 블로그는 하나의 ‘성지(聖地)’로 존재할 것이라는 예감마저 든다. 어쩌면 ‘성지순례 블로거들’이 레싱할머니의 블로그에 몰려들 것도 같다.
역대 노벨 문학상 수상자 중 최고령인 89세로 노벨상의 영예를 안은 영국의 이 할머니 작가는 노벨상이라는 상 자체를 시큰둥하게 여기는 듯한 ‘도도한 발언’으로 작가의 자존심을 만방에 알렸었다. 노벨 위원회가 오래전 자신을 무례하게 대했다며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않은 것이다.
스웨덴의 노벨상 위원회 사람들에게 ‘원로 문인’다운 쓴소리를 서슴없이 내놓는 그 ‘기개’가 대단하다.
“그들은 '언젠가 그 여자에게 상을 줘야 할 텐데'라며 걱정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흥분하고 기뻐해야 하나요. 난 이미 유럽에서 많은 상을 받았어요."오래 전에 노벨상 선정위원회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나는 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어요. 40년 아니면 35년 전쯤인데, 그들은 나에게 사람을 보내서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무례하고 바보 같은 짓을 했어요. 그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에요.”
그래도 “이번 수상으로 포커에서 최고의 패로 치는 로열 플러시 패를 쥐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덧붙여 노벨상이 아주 싫은 건 아니라는 의중도 내비쳤다.
노벨상 수상 후 1년이 지난 작년, 이 할머니 작가는 노벨상 수상을 ‘끔찍한 재앙’이라고 표현했다.
BBC 등 외신에 따르면 레싱은 영국의 라디오4 프로그램에 출연해 “미디어의 지나친 관심 때문에 글쓰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며 “소설 쓰기를 거의 포기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요즘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인터뷰하고 사진 찍히는데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라며 “노벨상 수상은 끔찍한 재앙”이라고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참 대단한 할머니다. 보통사람들 같으면 60년 가까이 ‘현역’으로 글을 써왔으니까 이제는 그냥 그런 ‘망중한’의 시간들을 즐겨도 될 나이라고 생각할 텐데 여전히 글 쓸 시간을 빼앗긴 것을 아쉬워하는 문학을 향한 할머니의 자세에서 경이감마저 느껴진다.
그날 라디오 인터뷰는 레싱의 신작 <알프레드와 에밀리>의 출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됐다고 한다. 구순의 나이에 신작 소설을 내놓는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일일 것이다. <알프레드와 에밀리>는 픽션과 사실을 혼합한 작품이라고 한다.
자신에게 지상의 세월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느껴선지 레싱 할머니는 “아마 <알프레드와 에밀리>가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며 “이제는 쓸 시간이 없고 기력도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도 이 할머니 작가는 ‘블로그’라는 ‘새 영역의 글쓰기’에 ‘귀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독학으로 문학의 길에 들어선 ‘자수성가형 문인’답게 할머니는 늘 1분1초를 아까워하면서 글쓰기에 전념해 왔을 것이다. 그러니 툭하면 ‘인생이 힘들다’고 투정부려온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겐 이런 할머니는 그야말로 ‘서프라이즈!’다. 그래서 나는 만나본 적 없는 이 할머니를 나의 ‘멘토’ 중 한 분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90평생 숱한 인생의 역경을 지내오면서도 언제나 꼿꼿한 자세로 글을 써왔다는 사실은 ‘살아있는 전설’의 경지라고 할 수 있겠다. 이 할머니 블로거에게 이제 과연 무엇이 두렵겠는가!
도리스 레싱은 1919년 이란에서 영국인 부모 아래 태어났다. 1927년에 영국의 식민지였던 짐바브웨 남부 로디지아로 부모를 따라 이주한 뒤, 열세 살 때부터 학교를 그만두고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녀는 1943년과 1949년 두 차례 이혼하기도 했으며 한때는 영국 공산당에서 활동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요즘은 영국 런던 교외 햄스테드에서 홀로 거주 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할머니작가는 외로울 시간이 없을 것 같다. 블로그가 있으니까.
도리스 레싱의 첫 장편은 『풀잎은 노래한다』(1950년 발표)이며, 이후『황금 노트북』과 『가장 달콤한 꿈』등을 출간하면서 페미니즘을 비롯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인종차별, 생명과학, 신비주의를 바탕으로 정치, 사회, 문화, 종교, 사상 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다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60년을 글쓰는 일에만 바쳐온 인생이니 그의 작품 세계는 다채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서술기법이나 소설 형태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성장소설, 모더니스트적 수법으로부터 우화, 설화, 로망스, 공상과학소설을 망라한다.
또 그의 관심사는 수피즘 같은 신비주의뿐 아니라 정신분석학, 마르크시즘, 실존주의, 사회생물학 같은 20세기의 주요한 지적 문제들을 모두 포함한다. 이러한 다양한 소설에서 결론적으로 레싱이 전하는 한 가지 문제를 요약하자면 그것은 역시 글쓰기란 행위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등단 이후 줄곧 페미니즘적 경향의 작품을 추구한 레싱의 국내 소개 작품들도 대부분 여성주의 색채가 짙다. 이 중 내가 특히 좋아하는 작품은 2003년 소개된 ‘런던 스케치’다.
카페나 병원, 지하철 등 일상적인 공간을 통해 런던 사람들의 삶을 예리하면서도 따뜻한 눈길로 그려낸 열여덟 편의 단편으로 구성됐다.
임신한 채 가출한 소녀, 서로 깊은 골이 파인 모녀, 전 남편과 미묘한 관계에 빠진 여성 등을 통해 심리변화의 섬세한 결을 긴장감 있는 호흡으로 탁월하게 그려냈다. 힘든 우리네 인생은 세계 어느 곳 그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걸 이 할머니 작가는 담담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레싱의 작품세계에 대해 "분열된 문명을 비판적으로 다루면서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작품에 담아낸 서사성이 뛰어난 작가"라면서 그의 노벨상 수상이유를 밝혔었다. 레싱의 작품 가운데 특히 『황금 노트북』(1962년 발표)이 가장 두드러졌다고 한림원은 전했다.
한림원은 또 『마나와 단』같은 레싱의 최근 작품들에 대해 "인류로 하여금 더 원시적인 생활로 돌아가게 만드는 전 지구적 재앙에 대한 관점이 그녀에게 특별한 영감을 제공했으며 레싱으로 하여금 인간성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기본적 특징들이 좌절과 혼돈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을 보였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노벨문학상 106년 역사상 열한번째 여성 수상자인 그는 건강상의 문제로 지난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으며 대신 런던 주재 스웨덴 대사관에서 노벨상을 건네받았다.
레싱 할머니는 요즘 블로그 활동을 왕성히 하진 못한다. 하지만 그의 블로그는 요즘도 늘 열려있다.
91세 할머니 블로거로서의 당당한 위상을 전 세계 블로거들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레싱할머니에게 경배를 바치고 싶다.
도리스 레싱 할머니 만수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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