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가 144년 만에 돌아오는 외규장각 도서들.
'장렬왕후 국장도감의궤’상권(사진 위쪽)과‘영조·정순왕후 가례 도감의궤’하권. /문화재청 제공
144년 만에 돌아오는 외규장각 도서와 경우 없는 프랑스 정부
어제(12일) 폐막한 ‘G20정상회의’의 핵심키워드는 ‘환율전쟁’이었지만 내겐 1866년 조선왕조 대원군시절 강
화도를 침공했다 퇴각하던 프랑스 군대가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들이 144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는 소
식이 가장 인상 깊었다.
이명박 대통령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12일 가진 한·불 정상회담에서 현재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있는 ‘조선시대 외규장각도서’를 ‘5년 단위 갱신 대여’라는 형식으로 돌려받는 것에 합의했다는 것이다.
이 뉴스를 접한 순간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둑이 ‘남의 집에 들어와 훔쳐간 값비싼 물건’을 선심이라도 쓰
는 양, 물건 주인에게 ‘빌려 주겠다’는 소리와 무엇이 다른가.
21세기 백주(白晝) 대낮에 이런 ‘ 경우 없는 소리’를 버젓이 하고 있는 프랑스 대통령 사르코지가 무슨 개그맨
처럼 보인다. 그래도 사르코지 대통령이 “이 책들은 한국인의 영혼과 역사가 담긴 것이기 때문에 조건 없이
인도하는 게 옳다”는 견해를 펼치며 반대 의견을 무마해 ‘대여 형식’으로나마 오게 되었다고 하니 천만다행
이라고나 할까.
다 알다시피 외규장각은 1782년 정조(正祖)가 왕실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했으며, 왕실 도서
관인 규장각의 분관이었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외규장각의 일부 서적
을 약탈하고 나머지는 불태웠다.
유주현의 소설 ‘대원군’에는 이들 ‘프랑스 강도들’의 약탈행위에 대적해 싸우는 우리 옛 선조들의 모습이 아
주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당시 국제정세에 영 어두웠던 대원군을 비롯한 지도부가 허둥대는 모습을 보면서
지도자의 판단력이나 자질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절감했다.
19세기 조선조 말 우유부단했던 지도자들로 왕조가 망했던 것처럼 21세기에도 자칫 ‘함량 미달’의 사람들이
무모한 ‘권력에의 의지’만으로 정치 일선에서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보면 영 불안하다.
누구라고 ‘지명’해서 말하고 싶진 않지만 지금 ‘차기 대권’에 목을 매고 있는 정치인 중엔 판단력이 한 나라를
맡기에는 역부족인 듯한 사람이 ‘대중적 인기’에만 의존해 행세하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다.
21세기 대한민국 지도자들의 조건 중에 으뜸은 무엇보다도 ‘순간 판단력’과 순간 대응력이 뛰어나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고선 국가 간 무한경쟁 시대에 돌입한 21세기에 살아남기가 어려울 것 같다.
문제의 외규장각 도서는 1975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던 한국인 박병선 박사가 도서관 별관
서고에서 발견하면서 알려졌다. 당시 박 박사가 찾아낸 외규장각 도서는 조선왕실과 국가의 주요 행사 내용
을 기록한 의궤(儀軌) 191종 297책이다.
지금은 80대 할머니로 암투병중인 박 박사가 아니었다면 이 귀중한 외규장각 도서들은 영구히 프랑스 국립
도서관 도서목록으로 존재할 뻔 했다.
외규장각 도서는 1992년 한국 정부가 서울대 규장각의 건의를 받아들여 프랑스 정부에 반환을 요청하면서
양국 사이의 현안으로 떠올랐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시절 방한한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반환을 약속
했고, 다음날 파리에서 공수돼 온 ‘휘경원 원소도감의궤’ 한 권이 한국에 전달됐다.
비록 한 권이지만 이렇게 ‘즉석 반환’조치가 이뤄진 건 당시 우리 정부에 ‘고속철 차량 선정’을 놓고 독일, 일
본과 경쟁 중이었던 프랑스정부가 우리의 환심을 사려고 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들이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강력 반대하면서 반환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 대
목이 좀 우습다. 아무리 ‘문화대국’을 자처하는 프랑스라지만 과연 ‘국립 도서관 사서’들의 ‘입김’만으로 반환
이 성사되지 않았을까?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납득하기 어려운 핑계를 댔다고 본다.
2000년 DJ정부 시절 방한했던 시라크 대통령은 외규장각 도서 반환조건으로 “한국이 외규장각 도서에 상응
하는 고문서를 프랑스에 제공한다”는 조항을 내세우는 바람에 한국 학계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반환은 불발되고 말았다.
프랑스인들 참 배짱도 좋다. 결국 남의 집 물건 훔쳐 가 놓고 되돌려 줄 테니 그와 비슷한 고가의 물품을 내놓
으라는 말인데... 도대체 대한민국을 얼마나 우습게 여겼으면 이런 ‘이상한 조건’을 제시했겠는가.
지난 2007년 2월 우리 시민단체는 파리행정법원에 반환소송을 제기했고, 지난해 12월 30일 파리행정법원은
‘약탈’을 인정하면서도 반환청구는 기각했다. 약탈이지만 돌려줄 필요는 없다는 소리는 또 무슨 경우인지 모
르겠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우여곡절 끝에 어제 드디어 '5년 단위 갱신 대여'라는 형식으로 돌려받는데 양국 정상이
합의한 것이다.
어쨌든 무려 144년만에 우리 선조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외규장각 도서가 돌아온다는 사실 그 자체
는 환영할만한 일이다.
이번에 돌아오는 외규장각 도서는 대부분 왕이 열람하는 어람용(御覽用) 의궤로, 국내에 없는 유일본도 30책
이나 된다고 한다.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 행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그림으로 남긴 국가기록물이다.
왕이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와 사고에서 보관을 위해 제작하는 ‘분상용(分上用)의궤’가 있다. 외규장각 도서
는 조선후기 서책 문화의 최고 백미이며, 내용뿐 아니라 표지와 종이 질, 장정, 선명한 글씨 등 문화재로서도
뛰어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번 G20 정상회의에서 소중한 우리 문화재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꽤 의미있는 일이지만 프랑스 측의 ‘경
우 없는 자세’를 보며 우리 대한민국이 국력을 더 키워야만 되겠다는 생각을 절실히 해본다. 비단 프랑스 뿐
만 아니다. 영국이나 일본에 유출된 수많은 우리 문화재를 조속한 시일 안에 되돌려 받으려면 무엇보다도
우리의 문화적 내공을 더 키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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