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
조용히 보낸 헤밍웨이 기일(忌日) 50주년“자살로 生 마감했기때문”
50년 전 오늘(2일) 아침, 미국의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아이다호 주(州) 케첨시(市) 자택에서 엽총 총구를 입에 문 채 격발해 스스로 62년의 생을 마감했다. 1899년 7월 게자리태생으로 196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헤밍웨이는 전형적인 ‘미국 남자’로서의 ‘멋진 삶’을 추구하며 살다 갔다.
그의 삶을 다룬 전기(傳記)를 보면 스타일리스트로서 그가 자신의 외모에도 엄청 신경을 썼다고 나온다. 덥수룩한 수염에 아무 옷이나 걸친 것 같지만 의외로 소소한 일상에 세심한 신경을 쓰며 살았던 남자다.
글 쓸 때도 완벽주의를 지향해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단의 반응에 엄청 신경을 쓰는 스타일이었다.
그의 50주기를 맞아 세계 각 곳에선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열리지만 고향인 아이다호 주 오크파크에선
특별한 행사 없이 조용히 보낼 것이라고 외신은 보도했다. 시카고 트리뷴 지(紙)는 헤밍웨이 재단이 그를 기념하기 위한 별다른 계획이 없이 지낼 것이라고 전하면서 ‘자살한 날을 기념하지 않으려는’ 입장을 이해할 만하다고 전했다.
일견 일리 있는 얘기다. 사실 어느 누구라도 자살로 생을 마친다는 것만큼 비극적인 사건은 없을 것이다. 더욱이 헤밍웨이처럼 미국의 대표적 작가로서 퓰리처 상, 노벨 상 등을 탄 그의 빛나는 이력을 감안해 볼 때 그의 ‘자살’은 슬픔 그 이상의 충격으로 미국사회에 큰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본다.
문득 자살한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의 2주기가 지난 5월 ‘성대히’ 열린 걸 떠올리며 ‘문화적 차이’를 넘어서 자살 그 자체를 ‘자랑스럽지 않은 행태’로 간주하는 듯한 미국인의 정서를 이해할 수 있었다.
크리스천이 대부분인 미국사회에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은 ‘죄악’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밝고 의협심이 넘치는 전형적인 ‘미국소년’ 헤밍웨이는 큰 덩치와 함께 고교시절 풋볼 선수로 뛴 무척이나 외향적인 소년이었다. 그는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지방 신문사에서 올챙이 기자로 활동하다가 1차 세계대전 막바지 치열한 전쟁 터였던 이탈리아에 1918년 미국 적십자 야전병원 수송차 운전병으로 자원해, 종군했다.
기자들의 ‘로망’이기도 한 ‘종군 기자’라는 자부심으로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그는 다리에 중상을 입고 밀라노 육군 병원에 입원했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부상당한 첫 미국인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종전 후 1919년 귀국한 그는 캐나다 '토론토 스타'지의 특파원이 되어 다시 유럽에 건너갔다. 각지를 여행하며 그리스-터키 전쟁을 보도하기도 했다.
파리에서는 거투르드 스타인, 에즈라 파운드 등과 친교를 맺으며 작가로서 성장해갔다. 특히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피츠 제럴드와의 각별한 우정과 이별은 당시 미국과 유럽 문단에 화제가 되었다.
처음 문단 데뷔시절엔 이미 유명작가로 자리 잡은 피츠제럴드에게 문장수업을 받을 만큼 친밀한 사이여서 한 때 동성애 관계라는 오해까지 받았지만, 단순한 우정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세월이 흐르면서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성경 말씀처럼 헤밍웨이의 명성은 피츠제럴드를 앞질렀고 우정에 금이 가고 말았다. 어쨌든 헤밍웨이는 그 유명한 단편 소설‘노인과 바다’로 1953년 퓰리처상과, 195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자신의 종군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장편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등으로도 유명세를 탔다.
헤밍웨이하면 열정적이고 남성적인 카리스마의 소유자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는 우울증에 시달렸고 양극성 인격장애와 당뇨 고혈압 등 살아있는 ‘종합병원’처럼 병을 달고 살았다.
부침이 심한 성격 탓인지 결혼을 네 번이나 했다. 그러면서도 늘 호쾌한 남아로서 비쳐지기를 원해 트러블 메이커라는 별명도 들었다.
헤밍웨이는 산부인과 의사였던 아버지와 피아노 선생이었던 모친 사이에서 비교적 유복한 성장기를 보냈다. 하지만 그의 부친 역시 우울증에 시달리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25세 때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집안 내력’ 탓인지 헤밍웨이 가문에선 유독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한 사람이 많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기에’ 기일을 기념하는 행사를 갖지 않는다는 헤밍웨이 재단에 관련된 신문기사는 많은 걸 생각하게 해준다. 대한민국에선 최초로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한 대통령의 기일에 연예인들이 무슨 축제처럼 무대에서 요란하게 공연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미국과 한국의 정서적 문화적 차이라고 본다.
'국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클린 케네디의 ‘백악관 시절 육성고백'-케네디 암살 배후는 린든 존슨 부통령 (0) | 2011.08.10 |
---|---|
‘노르웨이의 숲’ 대학살, 부모의 이혼과 결손가정 소년의 상처가 원인 (0) | 2011.07.26 |
‘몸종’만 80 여 명인 찰스 왕세자와 쇼핑카트 직접 미는 평민 며느리 캐서린 (0) | 2011.05.18 |
영국 윌리엄 왕자빈 케이트와 일본 왕자빈 마사코의 매운 시집살이 (0) | 2011.05.04 |
슬픈 윌리엄 왕자의 동화 같은 해피 웨딩 스토리 (0) | 2011.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