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조국을 떠나라”고 조언, 파문을 일으킨 피에르첼리 루이스대학 총장.
(로마=김홍수 기자)
이태리 최고 명문 로마 루이스大 첼리 총장-
'아들아 조국을 떠나라!'
"아들아, 그동안 부모의 기대 이상으로 잘 자라줬다. 대학 졸업을 앞둔 네게 이런 말을 해야 하는 게 슬프지만, 이 나라는 더 이상 네가 자부심을 가질 만한 나라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만약 이런 내용의 글을 최대 일간신문에 기고했다면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까. 그것도 시중 장삼이사(張三李四)도 아닌 최고 명문대학교 총장이 썼다면 아마도 이 작은 나라는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는 누가 무슨 말만 했다면 특히, 좌파를 ‘씹는’말을 아차 실수로라도 했다면 그 말한 사람은 물론 주변인사들 까지 무슨 조선시대 역모죄를 다스리는 것처럼 거의 ‘3족을 멸하는’ 수준으로 소위 말하는 'SNS심판'으로 작살내고 마는 아주 이상한 풍토가 판치기 시작했다.
사실 확인이나 좀 하고 그러라면 대번에 비아냥이 뒤따른다. 무서울 정도다. 그러니 “조국이 별 볼일 없으니 미련 갖지 말고 외국으로 떠나라”라는 매국노같은 기고문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최고 명문대 총장’이 최대 일간지에 실었다면 그의 ‘목’은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문제적 글’은 이탈리아의 최고 명문대라는 로마의 루이스대학 첼리 총장님이 꼭 2년 전인 2009년 11월 이탈리아 최대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에 자신의 아들에게 편지형식으로 쓴 글이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이탈리아도 ‘사람 사는 곳’이니 이런 선동적인 기고문을 게재한 뒤 무사할 리는 없었던 듯하다.
가뜩이나 ‘다혈질들’로 알려진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 푸르르한 기질이 한국사람 못지않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그 신문 인터넷 홈페이지에 실린 기고문엔 댓글 2540개가 붙을 정도로 논란이 일었다. 파문이 커지자 나폴리타노 대통령은 "청년들이여, 이탈리아는 다시 성장할 수 있다. 조국을 떠나지 말라"고 호소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문제의 기고문’은 역시 최고 명문대 총장님이 쓴 글답게 이탈리아가 쇠락해가는 이유와 구조적 문제점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그것은 이탈리아뿐 아니라 스페인·그리스·포르투갈 같은 남유럽 국가모델 전반에 적용되는 얘기였다.
지금 자고나면 터져 나오는 ‘유럽發’ 경제위기는 이미 ‘알 사람은 다 알고’ 걱정하는 무서운 현실이었던 것이다. 이 ‘경제위기’에서 자유로운 국가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게 우리를 더 공포에 빠뜨린다.
총장님은 왜 그런 글을 기고했을까.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 청년들이 일자리가 없고, 있다 해도 저임금 임시직밖에 없어 희망을 잃은 현실을 고발하고 싶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다. 바로 우리 이야기 아닌가. 내가 알기로 이탈리아는 우리보다 경제규모도 크고, 국민소득도 우리보다 높은 국가다. 그런 나라에서조차 그 지경이니 지금 대한민국은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양호’한 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선지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에서 열심히 ‘종북활동’을 하고 있는 일부 정치인들을 비롯한 ‘온실 좌파’들이 마치 우리나라만 경제위기에 시달리고 있는 듯 선동적인 발언들을 하고 있다는 게 좀 딱해 보인다. 예전처럼 누구나 어느 국가나 지금은 다 같이 어려운 시절인 것이다. 우리만 힘든 시절인 것은 아니란 얘기다.
로마! 하면 온갖 ‘카리스마’ 가득한 문장들이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Roma was not built in a day.)’ 거나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풍속)을 따르라. (go to Rome, do as Rome dose.), 혹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등등이 위풍당당한 로마를 대변해주는 전설적인 문장들이다.
시인 폴 발레리는 ‘로마는 조직이 잘 되고 견고한 힘의 영원한 표본이다.’고 예찬했다. 그랬던 로마가, 그
랬던 이탈리아가 이제 경제위기를 겪으며 ‘풍전등화’같은 위기를 맞고 있다. 오죽하면 최고명문대 총장님까지 나서서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아들에게 “어서 이 나라를 떠나라”라는 '망언(妄言)'을 했겠는가.
2년 전 그렇게 이탈리아를 뒤흔들어놨던 첼리 총장은 2년이 흐른 지금 이탈리아 사정은 더 나빠졌다며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절절한 심정을 한국에서 찾아간 한 신문사 기자에게 털어놓았다. “희망이 거의 안 보인다”는 게 총장님의 조국 이탈리아에 대한 슬픈 전망이다. 이탈리아는 현재 재정위기에 몰리며 세계의 근심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상한 건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세계문명 발상지의 元祖格인 그리스도 거의 사경(死境)을 헤맬 정도로 경제위기가 극심하다는 점이다. 물론 그 두 나라 뿐 아니라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을 비롯한 남유럽 전체가 뒤숭숭한 형편이긴 하지만. 글로벌 시대니만큼 경제위기도 ‘도미노 현상’을 일으킨 다는 건 어쩌면 이상한 일도 아닐지도 모르겠다.
첼리 총장은 이런 현상에 대해 이런 분석을 내놓았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국가들)에 편입됐을 때, 국가·기업·대학의 경쟁력 강화 같은 새 게임의 룰에 빨리 적응했어야 했는데, 옛날 방식대로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은 게 잘못이다. 정부가 국제 룰(재정적자 통제)을 안 지켜도 된다고 안이하게 생각한 점도 똑같다."
남유럽 국민들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새 역사를 만들어 가겠다는 각오와 함께 문화적 혁신(renovation)이 필요하다.는 게 첼리 총장의 처방전이다. 자, 그러면 총장아빠로부터 ‘조국’을 떠나라는 명을 받은 아들은 지금 어디서 살고 있을까.
"허허허. 우리 아들은 아직 이탈리아에 있습니다. 올 연초 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자동차회사 페라리에서 6개월짜리 임시직으로 일하고 있죠. 월급이 700유로(110만원)밖에 안 돼요. 계약이 끝나면 외국으로 떠날 예정입니다. 내 기고문 때문은 아니지만, 점점 더 많은 우수 두뇌들이 이탈리아를 떠나고 있어요."
이탈리아 사정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대한민국도 ‘88만원세대’라는 신조어(이젠 구조어가 됐지만)가 범람하고 있어서 남의 이야기할 입장은 아니지만 ‘화려한 이탈리아’가 어쩌다 저리 됐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 이유를 이 총장님은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가족 경영 중소기업이 이탈리아 경제의 주축인데, 개방화된 글로벌 경제시스템에서 외국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점차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유감스럽지만 지난 2년 동안 바뀐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이탈리아는 미래를 위한 프로젝트가 전혀 없는 사회죠. 윗물이 흐리다 보니 국민들의 도덕성도 땅에 떨어져 있어요."
‘국민들의 도덕성’을 지적한 건 엊그제 사임한 ‘바람둥이’ 늙은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를 겨냥한 듯하다. 물론 정치인도 사생활은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일국의 총리가 그것도 70대 중반 노인이 10대 매춘소녀와 논다는 건 우리네 정서와는 너무 동떨어진 섹스라이프같다.
그런 사실이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는데도 그 늙은 총리는 물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경제'앞엔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엊그제서야 총리직을 아까워하면서 내놓았다. 다시 또 돌아온다는 말과 함께. 그야말로 노추(老醜)하다.
현재 이탈리아 기업들은 직원고용에 따른 복지비용을 회피하려고 3개월짜리, 6개월짜리 임시직 형태로 청년들을 고용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2~3년 임시직을 전전하다 보니 가정을 꾸리는 시점도 늦어지고, 그 결과 출생률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만 15~20세 인구가 10년 전에 비해 15%나 감소했다고 한다. 이태리 청년들은 이런 ‘고용문화’에 대해 불만이 엄청나다고 한다. 꼭 우리나라 실정을 말하는 것 같다.
이 청년 실업자들에 대한 국가 지원이 부족한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복지가 노년층에 편중돼 있어, 청년실업자 250만명을 돌볼 여력이 없어요. 지금까진 고도 성장기에 자산을 축적한 부모 세대가 그럭저럭 자식들을 건사할 수 있었죠. 하지만, 부모 세대 저축도 바닥이 드러나 더 이상 자식을 돌보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하이고!! 어쩜 이렇게 데칼코마니(대칭 닮은 꼴) 같은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바로 우리 대한민국의 이야기 아닌가 말이다. 무슨 대단한 애국자는 아니지만 첼리 총장님의 조국 이탈리아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대한민국 이야기를 그의 편지를 통해 새삼 알게 된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한 아침이다. 모닝커피마저 유독 쓴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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