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TV 수목드라마 각시탈의 한 장면. '反日 정서'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1970년 12월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가 폴라드 바르샤바의 유태인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무릎꿇고 사죄하고 있다. 일본은 이걸 보고 좀 배워야 한다.
일본인의 성역(聖域) '천황과 야스쿠니'는 '국가적 정신병'
요 며칠 새 일본은 호떡집에 불난듯 ‘국가적 호들갑’을 떨고 있다. 가만 보고 있으면 한편의 블랙코미디처럼 보인다. 아시아에선 '제일 나가고 있다'는 일본국의 정신적 수준이 의심스러울 뿐이다.
남의 나라 땅을 자기네 거라고 우기는 것도 모자라 이젠 남의 나라 대통령에게 ‘무례하기 짝이 없다’며 적반하장 격으로 우르르 일어나 소란피우고 있는 모습은 아무래도 21세기 국가 같지 않다.
지난 8월 10일 대한민국 대통령이 ‘자국영토’ 독도를 방문했을 때도 난리법석을 떨더니만 8월14일 우리 대통령이 일왕(日王)을 향해 ‘몇 마디’했다고 무슨 ‘불구대천’의 원수 대하듯 총력전 태세로
‘총리대신’이라는 인물부터 온갖 극우세력과 심지어는 좌파 매스컴으로 알려진 아사히신문마저 우리 대통령을 향해 “예의가 없네 어쩌네”하며 버르장머리 없는 발언을 대놓고 하고 있는 중이다.
가만 보면 해마다 8월만 되면 일본은 ‘패전 기념일’이 못내 가슴 아픈지 야스쿠니라는 신사(神社)에 연미복 차림의 ‘대신(大臣)’들이 쪼르르 달려가 머리를 조아리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대한민국 영토인 독도는 물론 중국과 분쟁 중이라는 댜오위다오라는 섬에 대한 설전도 꼭 8월이면 해마다 반복하고 있다. 그런 그들을 보면 아무래도 ‘국가 집단적 정신병’에 걸린 국민들 같다.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사셨던 나의 모친은 “8월 15일 덴노 헤카(天皇陛下)의 육성을 라디오를 통해 처음 듣고서야 천황도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고 내게 말씀하시곤 했다. 얼마나 철저한 ‘교육’을 시켰기에 ‘천황은 신’이라고 알았겠는가. 비단 나의 모친 뿐만 아닐 것이다. 그 시대 일본에서 교육받고 자란 사람들은 전부 그렇게 생각했을 거라는 걸 감안해보면 지금 일본인들이 ‘일왕’좀 비판했다고해서 저리도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 게 어쩌면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사실 이명박대통령이 한 강연회에서 “일왕이 통석(痛惜)의 염이니 이런 단어 하나 찾아서 올 거면 올 필요도 없다. 한국에 오고 싶으면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말한 것은 한치의 틀림도 없는 당연하고 올바른 발언이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은 벌떼처럼 윙윙 거리며 여야 정치인들은 물론 각계 각층 인간들이 곧 전쟁이라도 벌일 태세로 우리 대통령을 비난하고 나선 건 ‘국가적 정신병’이 아니고선 그렇게 하기 어려운 집단 발작으로 보인다.
2차 대전 이후 같은 패전국인 독일은 어떤 형식으로 세계인에게 사과했는지를 일본국민은 모르고 있는 듯하다. 아니다. 모를 리는 없다고 본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걸 모르겠는가. 단지 자신들의 ‘과오’를 그저 모른 척하고 싶어 할뿐인 것이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저변엔 바로 '천황'이라는 일본인들의 '성역'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1970년 12월,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를 방문한 당시 서독 총리 빌리브란트는 유태인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국가적 사과’의 참 모습이란 이런 걸 말하는 것이다. 지금 흐릿한 흑백사진으로만 봐도 뭉클해지는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모습이다.
반면 일본은 자신들이 저지른 온갖 만행에 대해 ‘국가적 차원의 사과’를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 현 일왕 아키히토는 부친 히로히토(裕仁)가 우리 민족을 비롯, 그들이 식민통치를 했던 동남아 몇몇 국가에 대해 어떤 ‘죄악’을 저질렀는지 훤히 알고 있을 텐데도 ‘모르쇠’로 그저 ‘착한 군주’행세를 하고 있다.
가끔 '왕비'와 함께 일본 매스컴에 등장하는 일왕의 모습은 그저 사람좋아 보이는 호호 백발 할아버지일 뿐이다. 어쩌면 '허수아비'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본 국민은 그 허수아비를 앞세워 민족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국가적 결속력을 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지도자에 그 국민이라는 말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겟지만 아무튼 일본인들은 부끄럽지도 않은지 오히려 저렇게 난리를 치면서 악악대고 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어떻게 저런 식으로 대한민국과 우리 대통령을 공격하는 지...참 뭐라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일본국과 일본국민은 극히 일부 양식있는 지식인이나 양심인들을 제외하고는 지금 ‘집단적, 국가적 정신병’에 걸려 있는 것 같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운 좋게도 이웃 국가에 일어난 전쟁덕분에 ‘군수산업’으로 패전국에서 일약 ‘승전국’처럼 부활한 일본은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국가답지 않게 좀스러운 면모만 보여줘 왔다. 오직하면 ‘이코노믹 애니멀(economic animal)이라는 불명예스런 별칭이 일본인들에게 붙여졌겠는가.
‘대국(大國)’으로서의 품격은 고사하고 아프리카의 후진국들보다 못한 이상한 ‘국수주의’에 빠진 일본은 지금 ‘경제위기’뿐 아니라 도덕적 위기를 겪고 있다. 자신들이 저질렀던 ‘천인공노( 天人共怒)할 만행은 싹 잊어버린 채, 그저 남의 눈에 티끌만 물고 늘어지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그런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고 확신한다.
일본인들이 그리도 신주단지 모시듯하는 ‘천황과 야스쿠니’는 일종의 ‘국가적 정신병’의 한 상징이다. 이걸 하루속히 치료하지 않는다면 일본에는 앞으로 더 큰 불행이 닥칠 것이다.
*아래 ‘야스쿠니’라는 다큐멘터리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난 뒤 쓴 소감을 다시 소개합니다.*
야스쿠니는 반성하지 않는다
92세의 일본도 장인 카리야 할아버지.
1945년 8월15일은 우리에겐 ‘8·15 해방’이지만 대일본제국을 꿈꿨던 일본인들에겐 전쟁패망의 국치일이다. 히로히토 일왕이 떨리는 ‘옥음’으로 ‘항복’을 선언하면서 제국주의 일본의 꿈은 일단 사라졌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해마다 8·15 무렵엔 일본 도쿄에 있는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일본 총리가 참배하네, 안하네로 시끄러워지곤 했다. 그만큼 한,중,일 3국에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도 드물 정도가 된 것같다.
2001년 이후 집권한 ‘사무라이 풍’의 고이즈미 총리는 야스쿠니 참배를 ‘공약’으로까지 내걸기도 했다. 취임공약에 까지 내걸어야 할 정도면 아무래도 일본국민들에게도 큰 관심사 중에 하나인 듯하다. 그런 고이즈미는 5년여의 재임기간동안 무려 6차례나 야스쿠니에 참배했고, 2006년 8월15일엔 아예 ‘연미복’차림으로 정식참배 모습을 보임으로써 한국, 중국의 정부와 시민단체로부터 격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막무가내, 오불관언의 자세로 밀고 나갔다. 안하무인이라고나 해야할지.,,
‘야스쿠니’가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 해마다 악순환처럼 한·중·일 3국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일까. 중국인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리잉은 10년의 ‘정밀 취재’ 끝에 우리에게 ‘야스쿠니’를 필름으로 선보였다. ‘각고의 노력’이 돋보인 작품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92세 노인이 날카로운 ‘니폰도(日本刀)’로 검도 동작을 취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나이보다 20년은 젊어 보이는 ‘일본도 제작의 장인(匠人)’ 카리야 할아버지는 일본이 ‘대동아공영권과 대 일본제국의 꿈’을 으스대던 시절부터 칼을 만들어 나라에 헌납해 왔다.보기에도 섬뜩한 그 칼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흉기라는 건 그에겐 별 의미가 없다. 그냥 묵묵히 자기 일을 해왔을 뿐이다. 노인은 지금도 정정한 현역으로 오로지 칼 만드는 일에만 혼신을 다하고 있다.
이렇게 영화의 한 축은 그의 칼 만드는 모습과 인터뷰를 담고 있다. 다른 한 축에는 야스쿠니를 ‘순국선렬의 영령’이 있는 곳이라며 지금도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들의 복장을 하고 참배하는 사람들, 일본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항의하는 사람들, 원하지도 않는데 왜 우리 가족의 이름이 여기에 있느냐며 항의하는 한국 사람들, 대만 사람들이 있다. 영화는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야스쿠니를 둘러싼 어수선한 현실을 시끌벅적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일본제국’시절의 옛 영화(榮華)를 못 잊는 호호백발 할아버지들은 수 십 년은 족히 되었을 군복을 갖춰 입고 일본도를 빼들고 보무도 당당하게 야스쿠니 신사로 행진해 나간다. 그들에겐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철벽같은 신념, ‘천황폐하’로 상징되는 대일본제국에 대한 애국심이 펄펄하다.
그런 그들이기에 요즘 젊은 애송이들의 한심한 작태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너희들이 대일본제국의 야마토 정신을 아느냐”고 흰 수염 휘날리며 대갈일성 하는 노인들의 목소리엔 제국주의 시절 군인으로서의 기개가 배어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 그들은 모른다. 가여운 인생들이다.
오로지 칼 만드는 일밖에 모르며 살아온 90대 노인은 세상일따윈 모르는 듯하지만 말을 안한다 뿐, 나름의 생활철학은 확고하다. 그 역시 ‘천황폐하’에 대한 충성심 하나는 대단하다. 1945년 8월15일 천황폐하의 ‘옥음’을 담은 테이프를 여태까지 ‘취미삼아’ 듣곤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노인은 일견 일본인의 장인정신, 일본의 국민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특정 이데올로기도 편들지 않고 전쟁도 싫어한다. 오직 자신의 일만을 열심히 하는 것이다. 자신이 만든 칼의 용도는 상관없다. 근대 역사에서 천황은 곧 일본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는 천황, 국가를 위해 일해왔을 뿐이다.
지금 대부분의 일본 올드세대들의 생각 역시 카리야 할아버지와 다르지 않다.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전쟁의 동기가 중요하고, 일본은 아시아 평화를 위해 전쟁을 했다고 배워왔다.
10년 넘게 일본에 살며 이 다큐멘터리를 준비해온 리잉 감독은 이 할아버지를 방문해 조금은 ‘어눌한 일본어’로 집요하게 야스쿠니와 일본도에 대해 소감을 물어본다.
1933년(소화8년)부터 종전의 해인 1945년까지 8천개가 넘는 ‘야스쿠니 도(刀)’를 만든 이 노인은 자신이 만든 칼의 ‘용도’에 대해선 애써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그는 자신의 ‘일’에 몰두해 ‘오늘’을 살아왔을 뿐 이다. '망백'의 노인이 나이보다 그렇게 훨씬 젊어 보이는 것도 어쩌면 이 ‘몰입의 세계’가 준 특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변하는 세월과 함께 이제 ‘일본도’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한때의 '정책적 오류'로 빚어진 자국민의 비극을 보상하는 차원에서 '명예로운 장소' 야스쿠니를 만들었다고 한다. 야스쿠니는 일본을 위해 목숨을 ‘헌납’한 240여만 '순국용사들'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우리로 치면 ‘국립현충원’과 비슷한 곳이지만, 일본인들은 거의 ‘종교’처럼 받들고 있다. 오죽하면 신사(神社)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일본에 억울하게 끌려온 이웃나라 젊은이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선 생각을 못하고 있는듯하다. 전쟁당시에 그랬듯이 그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결국엔 해당국간의 갈등이 빚어진 것이다. 이제 ‘야스쿠니’는 국제적 논쟁의 장으로 일본인의 부도덕함과 옹졸함을 세계에 알리는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2차대전 당시 한국인이나 중국인은 일본을 위해 총알받이가 되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죄없는 외국인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 후손들은 지금 저렇게 야스쿠니로 달려가 애타도록 절규하며 위패를 그들의 조국으로 모셔가야한다고 주장하지만 야스쿠니 신사측에선 그걸 허락지 않는다. 신사 담당자의 황당한 궤변은 어처구니가 없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야스쿠니는 '대일본제국'을 위해 ‘꽃잎처럼’ 산화한 영령들을 위령, 현양하는 곳이기에 타국인들이야 뭐라 하든 말든 ‘신사참배’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해마다 정월초하루면 ‘순진한 일본인’들은 이곳으로 ‘복을 빌러’ 우르르 몰려가곤 한다. 일반인들이야 정치성이 전혀 없는 단순 참배라 그렇다쳐도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의 참배는 차원이 달라진다.
그렇기에 일본국 총리의 ‘신사참배’문제는 늘 정치적으로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A급 전범’들의 위패마저 합사한 이후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전쟁피해 당사국에선 일본총리의 신사참배는 ‘절대불가’라며 목소리를 높여왔었다. 그럴수밖에 없지 않는가. 전범국가로서의 진정한 반성을 한다면 그런식의 행위는 하지 않는 것이 도리인 것이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 너희 아버지가 대만에서 죽었다면 너희는 어떻게 할건가!"라고 절규하는 이 영화에 나오는 대사처럼. 피해자의 생각은 하지 않는 일본인의 근시안적 단견은 용서받기 어려운 것이다.
일본의 강제징집으로 끌려가 억울하게 죽은 타국인의 영혼이 왜 ‘일본인 A급 전범들’과 함께 있어야하는지를 그 유가족들은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다. 영화 속 대만인 유가족 여인은 “영혼에도 품격이 있는 법”이라며 그런 전범들 속에 자신의 부친이 누워있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절규한다. 그럼에도 고이즈미 총리는 취임 첫해인 2001년 8·15 이틀 전날 전격 참배를 시작으로 급기야는 총리말년인 2006년 8월 15일 ‘연미복’까지 갖춰 입고 당당히 참배하기에 이른다. “너희는 떠들어라 나는 내 길을 가련다”식이라고나 할까.
이런 고이즈미에 대해 일본 지식인이나 아사히신문을 비롯한 진보 언론 그리고 시민단체에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일부에선 ‘위헌 소송’을 내 재판소로부터 ‘위헌’판결을 받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 속 고이즈미는 화가 잔뜩 난 사무라이 표정으로 “야스쿠니 신사참배는 마음의 문제이고 정신의 자유의 문제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일부 지식인이나 언론인들을 경멸한다”고 사무라이가 일본도(刀)를 마구 휘두르듯 거침없이 반박의 말을 쏟아내고 있다.
일본 최고 권력의 정점에 있는 총리라는 사람의 천박한 ‘의식 수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국민은 물론이고 아무 죄없는 이웃나라의 수많은 사람을 죽인 역사적 사실은 선반에 올려놓은 채 마음의 문제라고만 주장한다는 건 어불성설 아닌가.
실제로 고이즈미는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은 후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모른다”라고 신경질적으로 16차례나 소리를 질러댔다는 보도도 나왔었다. 적반하장이라고나 해야할지...그만큼 이 ‘야스쿠니’문제는 일본인들의 ‘성역(聖域)’이라고나 할까.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벌인 침략전쟁 탓에 애꿎게 죽어가야 했던 이웃나라 국민들의 죽음에 대한 ‘사죄’ 보다는 오로지 자국민 전사자들의 혼령에 대해서만 애틋해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집단적 국가이기주의에 빠져있는 것이다.
영화에선 야스쿠니 신사참배 기념식장에서 정성스레 인사말을 하는 동경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의 모습도 클로스업해주고 있다. 일본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극우보수인사인 그는 야스쿠니에서 ‘연설하는’ 자체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는 듯해 보였다. 일본의 ‘올드 세대’들이 왜 야스쿠니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지를 아주 극명하게 알 수 있는 장면이다.
그의 인사말 도중 젊은이 두 명이 ‘신사참배 반대’를 외치며 ‘난동’을 부린다. 극우인사들은 이들을 중국청년으로 단정하고 “중국으로 돌아가라”며 10차례 넘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그들을 때리고 쫓아낸다. 경찰에 인계되는 순간 어처구니없게도 그들은 중국청년이 아니라 일본청년들로 밝혀진다. ‘야스쿠니’를 일종의 ‘국가적 정신병’으로 규정하는 이 다큐멘터리 감독의 눈에 그래도 ‘희망적인 일본최후의 보루’는 일본의 순수한 청년들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일본인들에겐 성역이겠지만 세계인의 눈에는 ‘치부’로 보여질 수밖에 없는 ‘야스쿠니’를 영화사상 최초로 정면으로 다룬 이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는 감독이 ‘10년 적공’한 작품답게 ‘야스쿠니의 실체’를 담담하면서도 진지하게 드러내 보여준 수작이다. 123분의 러닝타임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2008년 홍콩국제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탔고, 미국 선댄스 영화제와 베를린 국제영화제 공식초청작으로 선정될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제작비가 없어 엄청 고생했고, 제작 도중과 다 만든 뒤에도 일본우익단체들로부터 심각한 테러협박을 받았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개봉한 일본에서 다큐멘터리 영화로선 ‘대박’을 터뜨리며 13만 명이 넘는 관객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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