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스턴시절의 아인슈타인-생애 최고의 행복감을느끼며 살던 시절.
프린스턴 시절 아인슈타인과 친하게 지낸 이웃사람들은 주로 유럽에서 망명 온 문화예술인들이었다. 철학자 오펜하임(Oppenheim), 역사학자 에릭 폰 칼러(Eric von Kahler), 그리스의 소설가이자 수학자인 헤르만 브로흐(Hermann Broch) 그리고 노벨 문학상수상자인 소설가 토마스만 등이다. 원래 아인슈타인은 타고난 예술가적 감수성과 함께 소년시절부터 읽어온 방대한 독서량 덕분에 과학자 뿐 아니라 문화예술인과도 깊은 교감을 이어왔었다.
1939년, 헝가리 출신 물리학자 레오 질라드는 아인슈타인에게 ‘핵폭탄의 가능성’에 대한 실험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때까지 핵을 사용해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던 아인슈타인은 깜짝 놀랐다. 아인슈타인과 질라드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즉시 핵무기 제조 가능성에 대한 경고의 편지를 보냈다.
“핵폭탄 하나를 항구에 터뜨린다면 그 항구는 물론이고 그 근처 지역전체가 파괴될 것입니다.”아인슈타인은 미국이 독일보다 먼저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아인슈타인의 편지를 읽고 핵무기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고 즉시 조치를 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맨해튼 프로젝트’로 명명한 이 핵무기 제조 작업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자금이 투입된 연구 작업이었다.
1945년 제2차 대전 막바지에 종전을 앞당긴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하루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3일 뒤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폭탄으로 당일 7만 명이상의 인명피해가 났다. 그 후로도 방사능 후유증으로 사상자는 두 배로 늘었다. 인류 역사상 초유의 대량 인명살상이 발생한 원폭투하는 인류에게 큰 각성을 요구했다.
아인슈타인은 핵폭탄 개발에 직접 참여하진 않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 서명한 것은 ‘내 생애의 실수’라며 회한에 잠겼다. 아인슈타인은 1945년 8월 종전 직후부터 원자력이 몰고 올 재앙을 막고 새로운 평화시대를 열기 위한 양심적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참여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그는 유엔에 세계정부의 역할을 촉구하는 성명서에 서명했다. 1946년 아인슈타인은 일반인들에게 원자력에 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하는 ‘핵과학자 비상위원회’의 회장직도 맡았다. 죽기 한 달 전쯤인 1955년 2월 아인슈타인은 11명의 세계 저명 과학자들이 서명한 인류평화를 위한 짧은 성명서를 작성했다.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의 요청으로 시작한 이 평화주의 운동은 미국과 소련의 군비경쟁을 우려하며 만든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이라는 성명서 형태로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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