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사진

상해 한인소년척후대 -한 장의 희미한 흑백사진이 주는 감동

스카이뷰2 2017. 2. 28. 13:47


           1930년대 상해한인소년척후대,사진 맨 왼쪽이 이번에 일기가 공개된 배준철 대원.




오늘 아침 신문에 실린 희미한 한 장의 흑백사진을 보며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 1930년대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를 돕던 '상해 한인소년 척후대'의 10대 소년 대원들이 나란히 서서 찍은 단체 사진이다. 독립기념관이  제98주년 삼일절을 맞이하여 중국에서 수집한 1930년대 후반 상해 한인사회와 독립운동의 동향을 알려주는 자료에서 발굴한 것이다. 70여년 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저렇게 어리디 어린 소년들까지 머나먼 상해땅에서 나름대로 한 몫을 했다는 사실이 갸륵하게 느껴진다.  


1932년 평북 선천 출생의 14세 소년 배준철은 윤봉길 의거 당시, 김구의 심부름으로 도산 안창호에게 피신하라는 전갈을 전하러 간 '소년 독립운동가'였다. 배준철은 13세 어린 나이에 1931년 상해로 건너가 한인사회에서 설립한 인성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그는 1930년대 후반 상해에 거주하면서 한인사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했고, 특히 인성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상해한인소년척후대의 부대장을 지냈다.


1932년 5월 임시정부가 항주, 진강, 장사 등지로 이동한 이후, 상해에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공개적인 기념행사가 불가능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배준철은 1935년 3월 1일 일기에 “금일 3월 1일 기념일이다. 금일은 제16회 3·1절 기념이다. 대한민국17년 기원 4268년 […] 한국의 아들과 딸 된 자는 누구를 물론하고 이 날을 거룩하게 하라”고 쓰고 있다. 10대 소년운동가의 투철한 독립운동 정신에 숙연해진다.


상해한인소년척후대는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 안에서 박성근(朴成根)과 박창세(朴昌世)의 차남 제건(濟建) 등 20여 명의 소년이 모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며 광복투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1930년 4월 이 단체를 조직했다. 그 해 9월 독지가의 재정적 지원을 얻어 용구를 구입하고 제복을 정제하는 등 항일투쟁의 결의와 자세를 새롭게 '맹세'했다.


소년척후대는 때때로 심신의 단련을 위해 상해 근교의 산간 지역을 내왕하면서 야영도 실시했다고 한다. 나라 잃은 소년들이 국권독립을 위해 단체 훈련을 하는 장면들이 역사적 감동으로 다가온다. 모든 물자가 부족했던 그 시절에 오로지 조국광복을 위해 심신을 단련하던 그 소년들의 '염원'이 오늘 대한민국의 기초석이 된 것이다.


김구(金九)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이 소년척후대를 집중적으로 지도, 후원해주었다고 한다. 소년들에게 장차 무장투쟁을 직접 지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1932년 4월 29일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윤봉길(尹奉吉)이 폭탄투척의거를 결행한 이후 임시정부 자체가 상해를 떠났기 때문에 소년척후대는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어딜 가든 어디에 있든 소년척후대의 '정신적 독립투쟁'은 빛났다.


상해 동자군(童子軍)의 후신이 바로 상해 소년척후대다. 기약없는 '조국광복'을 위해 어린 소년들까지도 그렇게 헌신했던 시절이었다. 지금 우리들은 70여년전 그 소년들과 그들을 지도하고 격려했던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은 까맣게 잊은 채 이렇게 혼돈의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10 여일 후면 '탄핵 인용' 혹은 '탄핵 기각'의 헌재 선고가 나온다. '찬탄' 세력이든 '반탄'세력이든

제발 70여년 전 저 10대 소년 독립운동가들로 결성된 '상해한인소년척후대'의 진정한 나라사랑 정신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오로지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권력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변질한 것 같은 '찬탄 반탄'대결구도는 하루빨리 정리돼야 할 것이다. 그야말로 '사심없는' 진정한 애국심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