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 /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赫赫)한 업적(業績)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行路)와 비슷한 회전(廻轉)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人生)이여
재앙(災殃)과 불행(不幸)과 격투(激鬪)와 청춘(靑春)과 천만인(千萬人)의 생활(生活)과
그러한 모든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節制)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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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의 격정적 시 '봄밤'과 요즘 방영중인 동명의 드라마 '봄밤'의 이미지가 묘하게 겹쳐진다.
드라마 '봄밤'은 청춘들의 엇갈리는 사랑이야기 치고는 차분한 전개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화면이 칙칙하고 전개가 느려터진다는 지적도 있지만 '천지구분 못하는 것 같은' 생경한 드라마들에 비해 안정적이고 매력있다는 평도 들린다.
'봄밤'이 함유하는 여러가지 이미지는 50년전 타계한 김수영 시인의 격정적인 시 '봄밤'에서 만개하는 것 같다. 김수영의 시는 늘 그렇듯 혁명적이고 격문같은 시 구절 구절이 사람의 마음을 뒤흔든다.
1968년 47세 아까운 나이에 교통사고로 숨진 시인 김수영의 시는 그가 썼다는 걸 모르고 읽어도 딱
느낌이 온다. 국문학도도 아니고 김수영의 시를 많이 읽은 편도 아닌데 말이다. '봄밤'도 마찬가지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고,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도 말라고, 시인은 절규한다. 봄밤에...
'재앙(災殃)과 불행(不幸)과 격투(激鬪)와 청춘(靑春)과 천만인(千萬人)의 생활(生活)과
그러한 모든것이 보이는 밤'- '봄밤'의 격정적 이미지가 이 구절에서 최고조에 달하는 것 같다. 모든 것이 보이는 밤에 시인은 결코 서둘지 말라고 속삭인다. 어쩌면 청춘의 봄밤을 지나가는 모든 인생들에게 시인은 그런 식으로 에둘러 조언하는 지도 모르겠다.
벚꽃 만개한 봄밤을 배경 화면으로 내보내고 있는 드라마 봄밤은 김수영의 시 봄밤과는 사뭇 다른 정조를 띄고 있다. 하지만 '사랑이 부재하는 시대에 사랑을 목말라하는' 청춘들의 엇갈린 사랑이야기로 아슬아슬한 스토리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격문같은 시구절들과 닮아있는 듯하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고...
절반쯤 전개된 드라마 '봄밤'은 네티즌들의 호불호가 엇갈리고 있다. 답답하고 지루하다는 비판도 있지만 오랜만에 '달디단 멜로드라마'에 박수를 보낸다는 이야기들도 나온다. 여주인공 한지민의 연기도 돋보인다.
오랜 연애로 답답해하며 매너리즘에 빠질 무렵 새롭게 등장한 아이딸린 미혼부 정해인을 향한 애틋한 눈빛이 꽤나 매력적이다. 출연하는 거의 모든 배우들의 연기 또한 자연스럽고 '리얼하다'. 그만큼 감독이 솜씨있다는 얘기다. 과연 '오래된 사랑'을 버리고 '새 사랑'을 택할지 아니면 '제3의 길'을 가게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래도 '볼만한 드라마'가 거의 없던 요즘 '봄밤'은 그나마 볼만한 드라마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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