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국 선수! 울지 말아요 !
‘운명’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운명’에게서는 왠지 슬픈 냄새가 납니다. 패배의 이미지가 느껴집니다. 사그라드는 기운이 감지됩니다.
체념이라는 말이 연결됩니다. 고독이라는 말과 결부됩니다. 서글프고 서러운 그런 처량한 기분이 됩니다. 멀어지는 연인의 뒷모습 같은 그런 단어인 듯합니다.
‘운명’이라는 단어와 맞닥뜨렸을 때, 이제까지의 경험법칙상 유쾌한 이미지는 거의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운명’엔 거의 언제나 ‘슬플 비(悲)’자가 따라 붙는 게 예사롭죠.
언뜻 떠오르는 말이 ‘비운의 황태자’ 혹은 ‘비운의 공주’ 아니면 ‘비운의 천재’입니다. 이런 걸 보면 제게는 어지간히 페시미즘적인 경향이 있나봅니다. 하지만 그런 ‘슬픈 분위기’는 싫고, 환하고 밝은 이미지를 더 좋아하는 걸 보면 낙천적인 소질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운명’이라는 말을 저는 아주 싫어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습니다. 무릎을 크게 다쳐 독일로 날아간 우리의 이동국선수가 그곳 병원으로부터 ‘독일 월드컵 출전 불가’라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바로 그 놈의 ‘운명’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아드보카트 호의 황태자’로 등극했던 이동국이 ‘비운의 황태자’가 되었다는 소식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아무런 인척관계가 없는 순수한 팬의 입장이지만 이동국에게 닥친 ‘운명’에 진심으로 화가 나기도 하고 가슴이 저미는 고통이 느껴지면서 아침부터 오랜만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왜 있잖습니까. 저도 모르게 주르르 흘러내리는 눈물! ‘어쩌지 어쩌지’ 하면서 그저 탄식만 나왔습니다. 절대자에게 항의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횡포를 부리는 운명’앞에 그냥 오늘 하루는 무작정 울고만 싶다는 소녀적인 감상마저 들더군요.
이동국은 ‘화사한 꽃미남 시절’인 19세 때, 프랑스 월드컵에 최연소 한국대표로 출전해 온국민에게 ‘뜨거운 환희’를 선사했던 축구천재였죠.
지금 떠오르는 스타인 박주영보다 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의 출중한 외모도 한 몫 거들었던 것 같습니다. 철없는 소녀들은 ‘오빠부대’를 결성할 정도로 그는 눈부신 청년이었습니다.
프랑스 월드컵의 화려한 데뷔 이후 이동국에겐 ‘비운’이 따라다녔습니다.
일부에서는 이동국이 자만에 빠졌다면서 그를 ‘게으른 천재’라고 조롱했습니다. 이러저러한 ‘나쁜 이야기들’이 그를 에워쌌습니다.
결국 이동국은 대망의 ‘2002 월드컵’ 무대에 서지 못하는 ‘운명’을 맞아야 했습니다. 함께 ‘초록의 무대’를 뒹굴던 선후배들이 전국민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포상금’이다 ‘군 면제’다 하며 축배를 들 때 그는 ‘술’에 의존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고, 결국은 국가의 부름으로 입대했습니다.
남자들은 흔히 ‘군대 가면 사람 된다’는 속설도 있듯이 우리의 이동국도 ‘상무’에 들어가면서 거듭 태어났습니다.
다시 예전의 그 화려했던 이동국으로 돌아왔고, 본 프레레 감독에 이어 아드보카트 감독의 ‘황태자’로 입지를 굳혔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게임이 있습니다. 벌써 재작년이었나요, 독일과의 한판 싸움에서 우리가 3대0으로 독일을 대파했을 때 이동국의 그 멋진 ‘발리슛’! 그 통쾌함이란.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에서 우리 감정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했지만 저는 우리 꽃미남 청년들이 온몸을 던져 그물을 가르며 골을 성공시킬 때 최고의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그들의 그런 슛 골에서 받은 약효는 좀 과장되게 말하면 거의 1주일은 갑니다.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기쁨을 선사하는 그 청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떨 때는 그들의 멋진 골인 장면이 계속 눈앞에 어른 거려 혼자 실실 웃기까지 합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미쳤군!’하겠죠.^^
이동국의 ‘발리슛’은 늘 멋집니다. 거의 발레를 하는듯한 그의 슛 골 장면을 목격하는 ‘횡재’를 할 땐 소파에서 저절로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까지 추기도 합니다. 그만큼 그의 슛은 폼나고 신납니다.
이동국도 이제 27세의 건장한 청년으로 데뷔시절 ‘꽃미남’ 자태는 벗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 축구대표팀 선수들 중 제일 잘 생긴 청년인 것 같습니다. 지금 그 모습 그대로 브라운관에 등장시켜도 ‘잘 나가는 탤런트’가 될 정도로 외모도 뛰어난 그는 작년인가요, ‘미스코리아’출신 신부를 맞아 가정을 꾸리기도 했지요.
최고의 스트라이커였던 이동국은 대표팀 전지훈련을 마치고 시작된 코리안 리그에서 펄펄 날아다녔다고 합니다.
‘악마의 부상’을 입던 지난 4월5일에도 4경기 연속골, 시즌 6호골을 터뜨리며 ‘황태자’의 입지를 확고히 굳혀나가고 있었다죠?
바로 그 날. 음습한 이미지의 ‘운명’이라는 놈이 이동국을 덮쳤습니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쓰러지는 ‘황태자’의 모습은 참으로 기이했습니다.
다른 선수와의 몸싸움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는 단독 드리블로 상대편 골문을 향해 질주하는 도중 ‘산사태’가 일어나듯 무너지면서 그 큰 몸집을 녹색의 잔디위로 접었습니다.
아 아 ! ‘운명’이었습니다. 정말 그가 어이없게 스스로 무너지는 장면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결국은 어제 독일의 병원으로부터 그런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진단’을 받은 겁니다.
자 ! 이제 어쩔 수 없습니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이동국선수의 얼굴에는 사람의 언어로는 설명하기 쉽지 않은 회한의 표정이 서려있더군요.
그 모습이 그렇게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아마도 이 선수 자신은 ‘죽음같은 아니 죽음보다 더 한 절망’을 느끼는 순간이었을 겁니다.
‘꿈의 무대’, 생떼 같은 젊음을 고스란히 바쳐 달려가던 그 무대의 코앞에서 저절로 ‘무릎이 꺾여버린’ 그 상황을 ‘운명’이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진단 받기 직전까지 이동국은 ‘10%의 희망’에 기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번만은 월드컵 무대에 서야겠다는 ‘의지’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운명’이 그걸 허락하지 않네요.
아마도 이동국은 통곡할 겁니다. 며칠은 아니 다음 월드컵이 열리는 2010년까지 이동국 가슴에 박힌 ‘운명의 대못’은 빼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무리를 해서라도 ‘뛰어보겠다’는 그의 ‘희망’은 일단 보류됐습니다.
지금 그에게는 어떤 위로도 필요 없을 겁니다. 어쩌면 ‘이동국은 죽었다’는 극단적인 절망에 절규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동국 선수! 그대는 아직 27세 청년입니다. 그대는 다시 우리 앞에 ‘환상적인 발리슛’을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대한민국의 대표선수입니다.
4년 뒤 그대는 31세의 ‘전성기의 기량’을 보여줄 수 있는 나이의 원숙한 선수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들인 이탈리아의 바지오선수도 31세, 브라질의 베베토도 34세 때에도 녹색그라운드를 누볐습니다. 멀리 볼 것도 없죠, 우리의 홍명보· 황선홍· 최진철 선수들이 모두 30대 선수들 아닙니까.
독일 월드컵만 월드컵이 아닌 겁니다.
아직 젊은 그대에겐 ‘더 좋은 날’이 더 많이 남아있습니다. 27세란 나이에서 끝나야할 선수라면 우리 국민은 그대를 더 이상 보려하지 않을 겁니다.
그대에게는 앞으로 두 번 정도는 더 ‘월드컵 스타’로서 대한민국을 빛낼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운명아 비켜서라 내가 나간다!’라고 외쳐보셔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이동국 선수! 울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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