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말아요, 태극 전사들!
“주심은 그라운드의 독재자다. 어떠한 반대도 용납하지 않는 고약하고 밉살스러운 존재다. 주심은 결정적인 운명을 예고하는 휘슬을 분다. 부심들은 주심을 돕기는 하나, 명령을 내리지는 못하고 그라운드 밖에서 주시할 뿐이다. 단지 주심만이 그라운드 안에 들어올 수 있다. 주심이 하는 일은 사람들의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축구에서 유일하게 전원 만장일치로 찬성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주심을 증오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항상 주심에게 휘파람을 불어대며 야유를 퍼붓는다. 그에게는 아무도 박수를 보내지 않는다. 패자는 주심 때문에 진 것이고, 승자는 주심과 상관없이, 주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긴 것이다.”
인용이 좀 길어졌죠? 제가 요새 조금씩 아껴가며 읽고 있는 우루과이의 작가 에루아르도 갈레아노가 쓴 축구 에세이집에 실린 ‘주심’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따온 부분입니다.
이 글을 보시니까 좀 시원하시죠? 오늘 새벽 4시부터 90분간 우리를 화나게 했던 아르헨티나 출신 주심 호라치오 엘리손도에게 딱 어울리는 대목인 것 같아서 좀 길지만 인용해봤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분명 이 독재자 같은 ‘주심’ 때문에 졌지 않습니까? 오프사이드 깃발을 올렸다가 스르르 내린 ‘맥없는 부심’은 또 어떻구요. 아마 그 부심도 주심이 ‘오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재빨리 ‘정세판단’을 했을 것 같군요. ‘어 내가 모르는 뭔가 있구나’ 라구요.^^ 부심이야 뭔 힘이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꽤 많은 축구 경기를 봐왔지만 오늘 경기처럼 노골적으로 주심이 편파 판정하는 건 첨 봤습니다. 첨부터 걱정이 좀 되긴 했었죠.
FIFA의 제프 블래터 회장이 스위스 사람이라는 게 은근히 신경이 쓰였죠.
더구나 그 블래터 회장의 생김새가 꼭 영화 ‘대부’에 나오던 말론 부란도 비슷한 것이 왠지 ‘암흑가의 보스’처럼 ‘눈빛’ 하나로 음험한 지시를 내릴 것 같은 분위기였으니까요. 그러니 ‘미운 주심’ 엘리손도 ‘후일’을 기약하려면 블래터 영감에게 잘 보여야 했겠죠.
경기 시작하기 직전 로열박스 안에서 베켄바워와 함께 폼 재고 앉아있는 블래터 FIFA회장의 모습을 보니까 불안감이 확 엄습해왔었습니다. 직감적으로 저 영감이 ‘무슨 지시’를 내렸을 것만 같은 불길함이 덮쳐왔거든요.
그러더니 90분 경기 내내 엘리손도 라는 주심은 우리 대한민국 팀이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절묘한 시점 마다 꼭 ‘맥을 끊어놓는’ 편파적인 휘슬을 불러댔습니다. 아마 그 휘슬 때문에 우리가 잃은 골이 한 두 어골은 될 겁니다.
급기야는 지금 이 시간까지도 전 세계적인 논란거리로 등장한 ‘명백한 오프사이드’를 아니라고 해서 우리를 결정적으로 패배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죠.
이건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을 아마 대한민국 시청자들은 누구나 하셨을 겁니다. 오죽하면 일본이나 중국의 언론도 ‘주심의 명백한 오판’이라고 했겠습니까?
그래도 명색이 02년 월드컵 개최국이고 4강까지 올랐던 ‘막강 대한민국’ 팀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편파 판정 속에 경기를 끝내야 했으니 우리 젊은 선수들은 너무도 가슴이 아플 겁니다.
하지만 우리 선수들 정말 잘했습니다. 토고나 프랑스전 때보다도 훨씬 성숙한 기량으로 텔레비전을 통해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수천 만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귀한 행복감’을 선사했습니다. 첨부터 아연 활기가 돌던데요.
비록 독재자 같은 무식한 주심 탓에 스코어로는 졌지만 우리 태극전사들은 그래도 품위를 잃지 않고 잘 싸워줬습니다. 모두 혼신의 힘을 다 바쳐 잘 했지만 그중 이천수 선수는 그야말로 ‘당돌한 플레이어’의 진면목을 보여줬다고 봅니다.
오늘의 MVP로는 이천수를 추천하고 싶군요. 아마도 오늘 경기에서 이천수처럼 빛나는 선수도 드물 겁니다. ‘날쌘 돌이’ ‘꾀돌이’ 이천수의 진면목을 고스란히 보여줬습니다. 그라운드를 종횡무진 누비면서 날아다니는 이천수를 보니까 마음이 그렇게 든든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에 ‘붕대투혼’을 끝까지 발휘했던 ‘맏형’ 최진철 선수도 감동적인 순간들을 선사했죠. 조재진도 스위스 선수와 부딪치는 바람에 많이 다쳐서 굉장히 아플 텐데도 끝까지 헤딩하는 모습이 빛나 보였습니다.
‘성스러운 녹색의 그라운드’에 한참이나 엎드려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던 이천수 선수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가슴을 아리게 했습니다.
이천수 뿐만 아니라 무뚝뚝해 보이는 우리의 수문장 이운재 선수가 한 손에 볼을 들고 한손으로 눈가를 닦으며 그라운드를 걸어 나오는 모습이나 눈두덩이 찢어져 임시로 붕대를 감은 노장 최진철 선수가 하늘만 쳐다보며 망연자실하게 서있는 모습, 박지성 선수가 큰 키의 후배 김동진 선수의 머리에 손을 뻗쳐 위로해주는 모습도 보기에 영 안쓰럽더군요. 이호나 김진규 박주영 같은 어린선수들의 얼굴 표정도 보기에 너무 딱하더군요.
오죽하면 스위스의 감독 쿤 영감도 “한국 축구 역시 강했다. 우리가 이긴 건 행운 덕이다”라고 말했겠습니까? 주심의 오판과 편파 판정의 시비도 있지만 그래도 젊은 스위스 팀도 ‘반짝반짝, 똘똘하게’ 잘 싸운 건 분명합니다. 아쉬운 건 우리에게 ‘행운의 여신’이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이겠죠.
경기가 끝난 후 우리 선수들의 ‘소감’도 의젓했습니다. 대한민국 축구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는 박지성은 “심판 판정이 애매하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경기의 일부분이다”라고 말했다죠. 자신의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을 것 같은 박지성다운 멘트였습니다.
90분 내내 ‘당돌하게’ 저력을 과시했던 이천수는 A형이라선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래 잘 울지 않는 편인데 오늘 많이 울었다. 이천수란 사람의 운이 여기까지인가보다. 정말 많이 노력했는데 너무 아쉽다.”
영리한 ‘합리주의자’ 이영표 선수는 “전체적으로 주심의 판정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스위스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오늘 경기 주심은 집으로 돌아가 TV로 경기를 다시 본다면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했답니다.
수많은 ‘선방’으로 우릴 기쁘게 해줬던 주장 이운재 선수 역시 주장다운 소감을 밝혔습니다. “심판 판정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 경기가 끝났기 때문에 말할 필요도 없다. 잘 준비해서 2010년 월드컵 대비하겠다.”
2006년 6월 24일 새벽 5시 50분 무렵 주심의 종료 휘슬이 울리면서 다가온 장한 우리 태극전사들의 낙망하는 표정들을 보면서 “괜찮아 자알 했어”라고 위로해 주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경기는 끝났습니다. 아쉬운 게 너무 많고 억울한 게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종료의 휘슬’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떡합니까. 이제 끝난 걸요. 그렇습니다. 이제 우린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앞으로 4년 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열린다는 차기 월드컵을 위해 우린 지금부터 다시 신발 끈을 동여매야 할 겁니다.
태극전사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분에 오래간만에 진실로 행복한 순간들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잘 했어요. 감사합니다. 태극전사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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